한국의 근현대 건축물의 현재 상태, 문화재가 되기 전 이야기
근현대 건축물은 지금 우리 곁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과거의 시간을 품고 있는 독특한 존재다. 이 건물들은 단순히 오래된 건축물이 아닌, 우리 사회의 격동기였던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의 삶과 문화가 집약된 공간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건축물들을 아직 '문화재'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건물들은 법적으로 지정된 ‘문화재’가 되기 전까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철거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라진 근현대 건축물은 수없이 많다. 필자는 지난 1년간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근현대 건축물을 답사하며 그들의 ‘현재 상태’를 기록해왔다. 이 글은 그 여정의 일부이자, 우리 모두가 ‘지금’ 기억해야 할 이야기다.
우리가 문화재로 지정하기 전에 사라지는 것들, 이름도 남기지 못한 건물들에 대해 지금부터 이야기해보자.
1. 문화재가 되기 전, ‘보존’은 누구의 몫인가?
체험 – 철거 직전의 가정집에서 마주친 시간
지난봄, 서울 은평구의 한 오래된 양옥집 철거 현장을 방문했다. 이 집은 1950년대 중반에 지어진 단층 양옥이었고, 벽에는 주인이 직접 그린 듯한 꽃무늬 벽지가 남아 있었다. 마침 철거 전 마지막 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필자는, 현장에서 철거업자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런 집은 관리비도 많이 들고, 그냥 부수고 새로 짓는 게 싸요.” 그의 말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 집은 단순한 주택이 아니었다. 6.25 전쟁 직후 피난 온 가족이 살던 곳이었고, 실제로 구호 물자 포장이 보관되어 있던 방도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자 시대의 증언이 된 공간이, 아무 기록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묘한 상실감이 밀려왔다.
전문가의 시각 – 문화재 지정의 난관
문화재로 등록되려면 까다로운 절차가 존재한다. 등록문화재는 구조적 안정성, 역사성, 건축미 등을 모두 평가받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근현대 건축물은 건축미보다는 실용성과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국가적 이슈보다는 개인의 삶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서류와 사진만으로는 그 가치를 설명하기 어렵고, 문화재 심사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 사라지는 근현대 건축물 – 흔적조차 남지 않는 현실
스토리 – 종로구 인사동의 폐가, 그리고 그 흔적
몇 달 전, 종로 인사동 뒷골목을 걷다가 철문으로 봉인된 낡은 2층 건물을 보게 되었다. 벽면에는 ‘철거 예정’이라는 붉은 글씨가 스프레이로 쓰여 있었고, 안쪽엔 누구의 것도 아닌 먼지가 쌓인 가구들이 보였다. 필자는 그 건물의 외부 사진을 찍고 주변 상인에게 물었다. “여기, 예전에 다방이었어요. 단골들도 있었고요. 지금은 아무도 관심 없죠.”
확인해보니 이 건물은 1960년대 후반 지어진 것으로, 당시 여성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잠시 운영된 적도 있었단다. 그러나 관련된 자료는 없고, 건축도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낡은 집’이라는 이유로 철거가 진행 중이었다. 문화재가 되기 전의 건축물들이 흔히 겪는 말 없는 퇴장이다.
제도적 허점 – 법적 보호 사각지대
현행 법제도는 ‘기념비적 가치’가 확인된 후에야 문화재 지정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건물이 기념비일 수는 없다. 오히려 일상의 공간이었던, 대중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축물이야말로 그 시대를 말해주는 진짜 목소리일 수 있다. 그런데도 그런 공간은 ‘기록되지 않음’으로 인해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3. 도시 재개발과 충돌하는 근현대 건축물의 운명
사례 – 서울 성동구의 근대형 연립주택 해체기
성동구 금호동에는 1970년대 초반에 지어진 연립주택이 있었다. 붉은 벽돌과 좁은 계단이 특징인 이곳은 당시 중산층 가족들이 모여 살던 주거지였다. 필자는 우연히 해당 건물에 살았던 주민의 소개로 내부를 촬영할 수 있었다. 부엌의 타일, 거실 벽지, 천장의 형광등까지 당시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도시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고, 며칠 뒤엔 완전히 철거되었다. “그냥 오래된 건물 아니에요?”라는 말이 익숙한 세상에서, 이 건물은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경제논리와 역사 보존의 충돌
서울과 수도권은 재개발의 논리에 의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근현대 건축물은 역사적 가치보다 경제적 효율성 앞에 밀려난다. 건축 전문가들은 “지금 철거되는 건물들이 30~40년 뒤에는 오히려 문화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는 너무 늦게 가치를 인식하고, 너무 빨리 파괴하고 있다.
4. 기록되지 않은 기억, 우리가 남겨야 할 사명
개인 기록의 중요성 – 사진과 메모가 되는 역사
필자는 매번 근현대 건축물을 방문할 때마다 가능한 많은 기록을 남기려 한다. 건물 외관뿐 아니라 구조, 내부 벽지 색깔, 창틀의 상태, 문지방의 높이까지 모두 노트에 적어둔다. 때로는 현지 주민과 인터뷰도 진행한다. 언뜻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러한 기록이 10년 후 ‘자료’가 되고, ‘가치’가 된다.
실제로 필자가 기록한 사진을 통해 한 건축물의 문화재 등록을 검토 중이라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아무리 작은 기록이라도, 그것이 쌓이면 건축의 역사가 된다.
시민 참여형 보존 운동의 가능성
최근에는 시민 주도로 근현대 건축물을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SNS를 통한 제보, 동네 건축 사진전, 소규모 기록 아카이빙 모임 등이 그것이다. 문화재가 되기 전에 우리가 직접 이 공간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보호란 거창한 일이 아니라, ‘기억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내용 요약
건축물의 현황 | 철거 직전, 방치, 재개발 대상 등으로 사라지고 있음 |
문화재 등록의 문제 | 역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 부족으로 탈락 |
제도적 한계 | 법적 보호는 극히 일부 건물에만 적용됨 |
경제 vs 역사 | 개발 이익이 건축유산 보존보다 우선되는 현실 |
해결 방안 | 시민 기록, 지역 커뮤니티의 참여, 정책 개선 필요 |
근현대 건축물은 여전히 ‘살아있는 과거’다. 그것은 단지 오래된 외벽이나 낡은 문짝이 아니라, 그 안에서 숨 쉬던 사람들의 삶과 시대의 감정이 응축된 공간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문화재가 되기 이전의 건축물들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매일같이 철거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남기지 않으면, 그 기억은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진 기억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필자가 만나온 건축물들은 말이 없었지만,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도, 기록될 가치가 있는 건축물은 분명히 존재한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다.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듣고, 기록을 남기는 일. 그것이 시간이 지난 뒤, 하나의 문화재보다 더 값진 유산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기억의 건축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