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위기의 한국 근현대 건축물, 사라지는 시간 속으로
도시는 늘 새로워지기를 원한다. 오래된 건물은 개발의 논리에 밀려 사라지고, 그 자리에 높고 반듯한 아파트나 상업시설이 들어선다. 우리는 변화와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익숙한 것을 지워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 익숙함 속에는 우리가 잊고 있던 시간과 기억, 그리고 시대의 흔적이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근현대 건축물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은 도시의 외곽이라는 이유로, 이 건물들은 하나둘씩 철거되며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이 건축물들은 단순한 낡은 건물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누군가의 삶과 공동체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시간의 기록’이다.
필자는 직접 발로 뛰며 소멸 위기에 놓인 근현대 건축물들을 방문하고, 현장을 기록하고, 주민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이 글은 그중 기억에 깊이 남은 건물들과 그 건물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록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더 늦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1. 충북 제천 – 폐쇄된 양조장, 기억을 담은 벽돌
시간 속에 멈춘 공간
충북 제천,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붉은 벽돌로 된 오래된 건물이 있다. 건물의 외벽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고, 이끼와 금이 간 벽돌 사이로 덩굴이 자라고 있었다. 이곳은 1930년대에 세워진 ‘○○양조장’이다. 필자는 우연히 지역 답사 중 이곳을 발견했고, 현지 주민의 소개로 내부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양조장은 1990년대까지 막걸리와 약주를 제조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실내는 비어 있었지만, 천장에 매달린 목재 빔과 큰 술통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 쪽 벽에는 ‘품질 제일’이라는 붓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어, 이곳이 단순한 공장이 아닌 자부심의 공간이었다는 걸 느끼게 했다.
기록 없는 문화유산, 누구도 모른다
이 양조장은 문화재가 아니다. 등록 신청조차 된 적이 없고, 건축물로서의 가치 평가도 받은 적이 없다. 주인은 고령으로 현재는 서울에 거주 중이며, 건물은 곧 철거될 예정이라는 소문만 돌고 있다. 마을 주민들조차 “그냥 옛날 양조장이죠”라고 말할 만큼, 기억에서조차 지워져가고 있다.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늦게 그 가치를 인식하고, 너무 빨리 그것을 잃고 있다.
2. 강원도 삼척 – 잊힌 간이역, 철로 위의 침묵
간이역, 그리고 나무 의자 하나
삼척의 한 작은 마을. 인적이 거의 없는 철로 옆에 단층의 목조 간이역 건물이 남아 있었다. 간판은 떨어져 나간 지 오래고, 창틀은 벌어진 채 찬바람이 스며들고 있었다.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역사는 이미 운영을 중단한 지 20년이 넘은 상태였다.
그러나 건물 내부에는 나무 의자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표를 발행하던 작은 매표소의 유리창도 깨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이동의 기억, 마을의 중심이었던 공간
지역 노인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에 여기서 탄 기차로 서울까지 갔지. 면회도 가고, 공부하러도 가고.” 이 간이역은 단순한 교통시설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꿈과 이별, 만남이 오고갔던 장소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고, 보호 대상도 아니다. 시에서는 철거 후 놀이터나 작은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의 집단 기억이 깃든 장소는 그렇게 또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3. 전북 군산 – 산업화의 기억, 오래된 제분소
방치된 기계와 먼지 위의 역사
군산항 근처에는 대형 곡물 창고와 제분소들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폐건물이 되었다. 그중 한 제분소를 방문한 날은 비가 오던 날이었다.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서자, 쌓여 있는 곡물 자루와 오래된 컨베이어벨트, 먼지에 덮인 기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공장 안은 고요했지만, 그 속에는 분명 ‘일하던 사람들의 손길’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여기서 하루 12시간 넘게 밀가루 포장을 했고, 누군가는 이곳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산업 유산의 현실 – 보존 아닌 방치
이 제분소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기업이 세운 것으로, 이후 민간 기업으로 인수되어 1980년대까지 가동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관리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토지 소유권 분쟁 문제로 보존 논의조차 어렵다. 산업화 시대의 흔적은 개발의 발목을 잡는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있다.
4. 근현대 건축물,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가?
유형의 형태보다 중요한 무형의 기억
우리가 사라지는 건축물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다. 그곳에 얽힌 무형의 기억들, 즉 사람들의 이야기, 삶의 방식, 당시에만 존재하던 분위기 같은 것들이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근현대 건축물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시대적 분위기를 담는 그릇이다. 목재 창틀의 삐걱거림, 낡은 간판의 글씨체,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결조차 그 시대만의 정서를 품고 있다.
기록, 보존, 활용 –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보존이란 거창한 단어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기록이다. 사진을 찍고, 글로 남기고, 인터뷰를 하고, 도면을 그리고, SNS에 공유하는 일. 그것이 이 건물들이 문화재가 되기 전, 세상에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필자는 지금도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 수천 장, 노트 수십 권, 그리고 사람들의 목소리. 그것이야말로 ‘시간의 구조물’을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지역 건축물 현재 상태 요약
제천 | 근대 양조장 | 1930년대 | 철거 예정 | 마을 자부심의 상징이자 지역 생산의 역사 |
삼척 | 목조 간이역 | 1950~60년대 | 폐역, 철거 계획 중 | 마을 공동체 이동과 연결의 중심 |
군산 | 제분소 공장 | 일제강점기~1980년대 | 방치 상태 | 산업화 기억이 응축된 산업유산 |
전국 다수 | 등록되지 않은 근현대 건축물 | 1930~1970년대 | 다수 철거·해체 중 | 무형의 기억과 시대 정서를 담은 공간 |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조용하다. 근현대 건축물도 그렇다. 뉴스에 보도되지 않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간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엔, 이미 그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건축물들이 철거되고 있다. 그 중 일부는 누군가의 고향이고, 누군가의 첫사랑이 머물던 장소이며, 어떤 이에게는 삶 전체였다.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았기에 보호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지금’ 기억하고, ‘지금’ 기록해야 한다.
건축물은 사라져도, 기록은 남는다. 그리고 그 기록은 미래 세대에게 ‘과거의 풍경’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창이다.
사라지는 시간 속으로 더는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보존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