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속 일제강점기 흔적과 그 의미
도시를 걷다 보면,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건물 속에 낯선 이질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곡선이 강조된 창틀, 낮은 기와 지붕, 붉은 벽돌로 지어진 집들. 처음엔 단지 ‘옛날 건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시기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특히 건축물이라는 물리적 구조물에 깊게 각인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관청, 학교, 병원, 우체국, 그리고 민간주택까지.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구조적, 상징적 흔적들은 아직도 우리 주변 곳곳에 존재한다.
이 글은 단순히 “일제 강점기 건물”이라는 태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남아 있는 근현대 건축물 속에서 그 시기의 흔적을 직접 보고, 그 의미를 다시 해석하며, 우리가 그 공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서울과 지방 도시에서 내가 직접 걸으며 만난 다섯 개의 건축물. 그 속에 남은 일제강점기의 잔향과, 우리가 마주해야 할 역사적 메시지를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1. 서울 중구 '구 조선은행 본점' – 권력과 지배의 상징
공간을 압도하는 대칭성과 석조 건축
서울 시청 앞, 세종대로를 걷다 보면 고풍스러운 석조건물이 시선을 끈다. 현재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구 조선은행 본점’이다. 외관은 유럽식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건물의 크기와 좌우 완벽한 대칭성, 기둥의 배치는 명확한 목적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지배의 시각화였다.
일제는 1912년 이 건물을 통해 한국의 금융 주권을 장악했으며, 조선의 수도인 경성(서울)에 일본 제국의 통제를 명확히 각인시키고자 했다. 필자가 직접 내부를 둘러봤을 때, 천장 장식과 바닥 타일, 금고의 무게감은 지금도 압도적이었다. 건물은 견고했고, 그 자체로 권력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건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재 이 건물은 ‘역사 교육의 장소’로 탈바꿈했지만, 그 근본에는 여전히 제국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보존의 가치와 함께, 지배를 기억하는 건축으로서의 해석이 필요한 공간이다. 단순히 외형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2. 대전 중구 '구 충청감영관사' – 조선의 행정 중심에서 식민지 통제 본부로
정체성의 충돌이 있었던 공간
대전역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구 충청감영관사’. 이 건물은 본래 조선시대 충청도의 관청이 있던 자리에 일제 강점기 새로운 행정청사로 세워진 공간이다. 붉은 벽돌, 목조 구조, 반쯤 개방된 복도형 구조 등은 전형적인 일본 제국주의 식 행정 건축 양식을 따른다.
내가 이 건물을 찾았을 땐 내부는 문화재로 등록되어 관람이 가능했지만, 대부분 방문객은 그저 “옛날 관공서”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축의 위치와 기능을 생각해 보면, 이 공간은 단순한 공공 건물이 아닌, 조선의 전통 권력 체계가 무너지고 식민 통치 체계가 들어선 상징적 현장이다.
건축물은 침묵하지만, 공간은 말하고 있다
건물 자체는 조용하지만, 그 배경을 알게 되면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건축물은 언어를 쓰지 않지만, 그 위치와 구조, 재료와 배치로 충분히 당시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고 있다. 침묵 속에서 말하는 구조물이다.
3. 경남 통영 '구 통영우체국' – 근대화와 통제의 이중성
빨간 벽돌과 기계적 배치
통영의 구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구 통영우체국’은 1930년대에 세워진 붉은 벽돌 건물로, 일본식 관공서의 전형적 구조를 따른다. 우편 업무뿐만 아니라, 감시와 통제 기능도 함께 했던 이곳은, 도시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통제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가 반영된 공간이다.
건물 외벽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지만, 필자가 찾았을 때는 내부 공간은 폐쇄되어 있었다. 당시 동네 어르신은 “여기서는 모든 편지가 검사되기도 했어요.”라고 회상했다. 단순히 우편 업무를 수행하던 공간이 아닌, 정보 통제의 거점이었던 것이다.
근대화라는 명목에 숨겨진 의도
‘근대화’라는 명목 아래 세워진 건물들은 겉보기엔 발전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통제와 감시, 수탈과 억압이 함께 존재한다. 이 건축물은 그 이중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4. 강원도 춘천 ‘구 조선식산은행 춘천지점’ – 경제 침투의 실체
웅장한 입구, 비좁은 내부
춘천 시내 한복판, 일반 상점들 사이에 웅장한 석조 건물이 하나 있다. 바로 ‘구 조선식산은행 춘천지점’. 이 건물은 1925년에 건립되어 조선 내 산업 자본을 통제하고 수탈하기 위한 거점 역할을 했다. 내가 직접 방문했을 때, 입구의 화강암 기둥은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내부는 다소 비좁고 어두웠다.
건물의 구조는 ‘외부의 위압감과 내부의 제한성’이라는 일본 제국주의 건축 전략을 반영하고 있다. 밖에서는 거대해 보이지만, 실제 내부는 ‘작은 사람들’을 통제하기에 적절한 구조다.
경제 건축의 정치성
경제 기관의 건축물이 단순히 금융 활동만을 위한 공간일 수 있을까? 이 건물은 단순한 은행이 아니었다. 경제적 침투의 상징, 지역 주민 경제 활동의 구속, 그리고 도시 공간의 권력화를 모두 포함한 복합적 건축이었다.
5. 전북 군산 ‘히로쓰 가옥’ – 식민지 엘리트의 삶을 엿보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에 남은 지배의 흔적
군산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주자들이 많았던 도시다. 그중 ‘히로쓰 가옥’은 일본인 지주가 1930년대에 지은 목조 저택으로, 지금은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일본식 정원, 다다미방, 목재 복도, 그리고 작은 연못까지 갖춘 이 집은 개인의 사적 공간이자, 식민 지배계층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공간이다.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 설명을 듣던 중 한 마디가 기억에 남았다. “이 집은 단지 잘 지은 집이 아니라, 조선에서 가장 높은 계층의 일본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외형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불균형한 권력 위에서 유지되었다.
미화가 아닌, 균형 잡힌 해석이 필요하다
관광지화된 건축물 중 일부는 외형의 아름다움만 강조된다. 그러나 ‘히로쓰 가옥’처럼, 일제 강점기의 권력 불균형 속에서 세워진 공간은 역사적 맥락을 배제한 채 미화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공간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의 일제강점기 흔적이 남은 근현대 건축물 5선 요약
1 | 서울 중구 | 구 조선은행 본점 | 1912 | 금융 지배 상징 | 화폐박물관 |
2 | 대전 중구 | 구 충청감영관사 | 1920년대 | 식민 행정의 중심 | 문화재 관람시설 |
3 | 통영 | 구 통영우체국 | 1930년대 | 정보 통제의 거점 | 일부 폐쇄 |
4 | 춘천 | 구 식산은행 지점 | 1925 | 경제 수탈의 상징 | 등록문화재 |
5 | 군산 | 히로쓰 가옥 | 1930년대 | 식민지 엘리트 주택 | 관광 및 교육시설 |
우리가 마주하는 근현대 건축물 속에는 단지 과거의 흔적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지배와 통제의 구조, 시대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기억의 정치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일제강점기 건축물들은 그 시기의 이념을 물리적 형태로 남긴 대표적인 구조물이며, 단순히 오래된 건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건축물들을 보존하는 것은 단지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유지하고, 교훈을 남기며, 역사를 다시 마주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 건물들을 통해 과거를 배우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기억을 단절시키지 않기 위해선 지속적인 관심, 균형 잡힌 해석, 올바른 기록이 필요하다.
근현대 건축물 속 일제의 흔적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며 해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기억의 건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