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 건축물과 지역사회: 보존인가 개발인가
도시는 시간의 흔적을 지닌 채 살아간다. 건물은 그 도시의 얼굴이고,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물리적 매개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근현대 건축물’이라는 단어는 낡고 오래된 것, 개발의 걸림돌, 철거 대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문화재로 지정된 몇몇 건축물은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대부분은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이 근현대 건축물은 지역사회에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보존과 개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 글은 내가 직접 경험한 몇 개의 지역 사례를 통해, 근현대 건축물이 단순한 공간을 넘어 공동체의 기억과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도시의 균질화가 진행될수록, 각 지역이 지닌 고유한 정체성과 이야기는 더 소중해진다. 보존은 과거에 집착하는 일이 아니다. 과거를 품은 채 미래를 설계하는 작업이다.
지금,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개발로 남는 것이 무엇이며, 보존하지 않을 때 사라지는 것이 무엇인지.
1. 근현대 건축물과 지역의 기억 – 사라지는 ‘삶의 흔적’
대전 원동의 옛 여관거리에서
2024년 가을, 나는 대전역 근처 원동 일대를 찾았다. 이곳은 1960~70년대 여관과 식당, 다방이 밀집해 있던 ‘기차여행자의 거리’였다. 지금은 대부분의 건물이 문을 닫았고, 간판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중 한 건물 2층에는 ‘○○여관’이라는 표지판이 아직 붙어 있었다. 철제 난간은 녹슬었고, 방 내부는 비어 있었지만, 곳곳에 세입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때 골목 안 작은 식당의 주인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여관이 있을 땐 참 북적였죠. 밤기차 타려면 다들 여기서 자고 가곤 했거든요. 이젠 아무도 기억 안 하죠.”
그 건축물은 단지 숙박공간이 아니라, 지역의 생활사와 상업사, 철도 교통사까지 품은 살아있는 자료였다. 그러나 개발이 시작되면서 철거가 예정되었고, 현재는 기록조차 남지 않은 상태다.
보존되지 못한 공간은 ‘기억되지 않는다’
이처럼 대부분의 근현대 건축물은 법적 보호 없이 지역개발과 재산권 논리 속에서 사라진다.
보존되지 않은 공간은, 언젠가는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지워진다. 결국 지역의 정체성도 사라진다. 이는 단순한 도시미관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역사 보전의 실패다.
2. 지역사회와 개발 압력 – 충돌과 타협의 현장들
광주의 구 양림동 – 보존과 상업화의 경계
광주 양림동은 선교사 주택, 미션스쿨, 근대식 교회 건물이 밀집한 지역이다. 이곳은 일찌감치 ‘근대문화유산거리’로 지정되어 일부 건물이 문화재로 등록되었고, 지자체도 적극적으로 보존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2023년 이후, 이곳에는 각종 카페와 갤러리가 빠르게 들어서며, 보존과 상업화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골목에 늘어선 이국적 간판과 외벽 리모델링은 건축물의 ‘원형 보존’보다는 ‘경관 중심 재구성’에 가까웠다.
한 지역주민은 말했다.
“건물은 남아있는데, 이 동네 분위기는 예전이랑 아예 달라졌어요. 전세값도 오르고, 원주민은 다 나갔죠.”
이는 ‘공간은 남고, 공동체는 사라지는’ 전형적인 보존 실패의 사례다.
전북 군산 – 기억을 자산화한 도시의 시도
반면 군산은 상대적으로 보존과 개발의 균형을 어느 정도 이루어낸 도시다. 동국사, 히로쓰 가옥, 구 조선은행, 일본식 상점가 등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고, 도시 자체가 ‘근대역사문화도시’로 브랜드화되었다.
현지의 한 상인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관광객이 많아졌지만, 예전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좋아요. 여긴 도시가 이야기를 해요.”
보존은 단지 철거를 막는 게 아니라, ‘기억을 활용 가능한 자산’으로 만드는 방식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3. 법적 제도와 행정의 한계 – 왜 보존은 어렵기만 한가?
문화재 지정은 어렵고, 보호는 미약하다
2025년 현재, 문화재청에 등록된 ‘등록문화재’는 약 600여 건. 대부분이 국가지정급으로, 민간건축물은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 특히 1950년대 이후 건축물은 대상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보존이 필요한 건축물이라도 소유자의 의지가 없다면 행정이 개입하기 어렵고, 재산권 침해 논란으로 인해 법적 보호도 제한적이다. 그 결과, 수많은 근현대 건축물이 ‘보호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주민참여 없는 보존정책은 실패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주민의 삶과 동떨어진 보존 정책이다. 실제로 서울, 대구, 광주 등지의 근현대 건축물 보존 사업이 주민 반발로 중단된 사례도 적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왜 낡은 건물을 보존하느라 우리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보존 논의에서 공동체와 실질적 이익이 소외된 구조를 보여준다.
보존이 지속가능하려면, 지역사회와 이익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4. 공동체 중심의 보존 모델 – 새로운 가능성들
성북구 아카이빙 프로젝트 – 시민이 주도한 기록운동
서울 성북구에서는 2020년부터 ‘성북동 근현대 건축 기록 프로젝트’가 주민 주도로 진행 중이다. 주민들은 골목의 오래된 건물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전·현 거주자의 인터뷰를 수집해 지역 건축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참여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보존은 전문가만 하는 일이 아니에요. 우리가 사는 동네니까 우리가 지켜야죠.”
이는 공공기관 중심 보존정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공간 활용과 콘텐츠 결합 – 기억의 지속 가능성 확보
보존된 근현대 건축물이 카페, 북스테이, 전시공간 등으로 활용되며 경제적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예:
- 목포 '○○책방' → 구 일본식 가옥 리모델링
- 전주 '○○갤러리' → 1960년대 은행 건물 개조
이런 방식은 기억의 공간을 현재의 콘텐츠로 연결함으로써 보존과 개발의 접점을 만들어낸다.
근현대 건축물 보존과 개발 요약
지역 기억 | 건축물은 공동체 기억과 역사 담는 공간 | 철거 시 기억의 단절 발생 | 보존은 과거의 연장 |
개발 압력 | 지역 활성화 명목으로 원형 훼손 사례 다수 | 상업화로 정체성 상실 | 균형 있는 설계 필요 |
제도 한계 | 문화재 지정 어려움, 사유재산권 충돌 | 보호 장치 미흡 | 실질적 보존 제도 필요 |
주민 참여 | 정책에서 주민 배제시 보존 실패 | 동의·참여 부족 | 공동체 중심 구조 필요 |
대안 모델 | 시민 기록, 콘텐츠 활용, 복합 공간화 | 지속가능성 확보 | 창의적 보존 전략 유효 |
근현대 건축물을 지키는 일은 과거에 머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간에 깃든 기억을 미래 세대와 나누기 위한 일이며, 도시의 정체성을 되살리는 과정이다. 철거와 재개발은 빠르고 편리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얻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반복된 풍경’일 뿐이다.
반면 보존은 어렵고 복잡하다. 제도는 미비하고, 주민의 이해를 구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제대로 된 보존은 도시를 더 풍요롭게 만들고, 그 지역만의 고유한 콘텐츠가 되어 문화적 자산과 경제적 자산을 동시에 창출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단순한 선택을 넘어선 고민을 해야 한다. ‘남길 것’과 ‘없앨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지역사회의 동의 없이 진행되는 개발은 결국 공동체를 해체한다. 반면 지역이 함께 보존을 선택할 때, 공간은 삶의 일부가 된다.
보존인가, 개발인가. 이 질문의 답은 하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왜 그 결정을 내리는가다.
그리고 그 선택이, 우리의 도시를 어떤 얼굴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함께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