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물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보존운동을 주도하는 시민단체들

헤이 봄 2025. 8. 4. 19:00

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그 과정에서 오래된 건물들은 너무 쉽게 사라진다.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세워진 근현대 건축물은, 아직도 그 역사적 가치가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채 ‘낡은 것’이라는 이유로 철거되는 일이 다반사다.

건축은 단지 기능적 구조물이 아니다.
그 공간을 살아간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고,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사회적 기록물이다.
하지만 행정의 손은 느리고, 법제도는 제약이 많으며, 개발 압력은 거세다.
그 가운데 도시의 역사와 지역의 기억을 지키는 역할을 묵묵히 이어온 이들이 있다.
바로 시민단체들이다.

이들은 직접 현장을 지키고, 자료를 수집하고, 때로는 거리로 나가 목소리를 내고,
또 때로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간을 다시 살려내는 실천적 움직임을 만들어왔다.

이 글에서는 근현대 건축물 보존을 위해 활발히 활동 중인 국내 시민단체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공간을 지켜내고 있으며,
왜 시민의 힘이 보존운동에 있어서 필수적인지,
그리고 앞으로의 보존운동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보존운동, 시민이 중심에 있어야 하는 이유

국가와 지자체의 한계

근현대 건축물 보존은 주로 문화재청과 각 지자체가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일부 건물에 국한되며,
소유주 동의가 없으면 제도적으로도 개입하기 어렵다.
예산, 절차, 행정적 기준도 보존에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그 사이에도 많은 건물들이 기록도 없이 철거되고,
사라진 자리엔 고층 주거단지가 들어선다.

시민은 ‘공간의 사용자이자 기억의 계승자’

시민은 단지 도시의 소비자가 아니라, 그 공간을 살아가는 주체다.
그들은 건축물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고, 그 의미를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민단체의 활동은 단지 보호운동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역사와 정체성을 지켜내는 문화운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2. 사례 ① 서울 성북구 '성북마을기록문화관'과 지역기록활동가

골목마다 기록자를 세운다

서울 성북구에는 오래된 한옥과 일제강점기 주택들이 남아 있다.
이를 지키고자 만들어진 ‘성북마을기록문화관’은 지역 시민단체, 주민자치회, 문화예술인이 함께 참여하는 독립 조직이다.
특징은 주민이 스스로 기록활동가가 되어 근현대 건축물의 역사와 스토리를 수집한다는 점이다.

나는 2024년 봄, 이곳에서 열린 ‘성북 아카이빙 학교’에 참여한 적이 있다.
참여자들은 각자 자신이 사는 골목을 관찰하고, 오래된 건물 사진을 찍고, 주민 인터뷰를 통해 기억을 채집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마을 책자로 엮거나 작은 전시를 열었다.

“이제 골목이 그냥 보이지 않아요.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공간을 다르게 느끼게 해줘요.”

기록은 단지 자료 수집이 아니라, 공간에 대한 인식 전환을 일으킨다.


3. 사례 ② 부산의 '해운대 옛역사 지키기 시민모임'

철거 3일 전까지 지킨 사람들

부산 해운대에는 1934년 지어진 목조역사 건물이 있었다.
도시철도 개발로 인해 철거가 결정되었고, 2019년 해운대구청은 아무런 예고 없이 철거 공고를 붙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역 시민단체와 철도 동호회, 건축문화연구자들이 즉시 연대해
‘해운대 옛역사 지키기 시민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24시간 릴레이 농성을 벌였고, SNS와 언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했다.
결국 철거는 중단됐고, 역사 건물은 임시보존 후 복원 논의로 이어졌다.

“딱 3일만 늦었으면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아무도 말리지 못했을 겁니다.”

이 사례는 시민이 얼마나 빠르게, 자발적으로 움직였는지,
그리고 시민의 집단지성이 행정 결정을 뒤바꿀 수 있었던 사건으로 남았다.


4. 사례 ③ 목포 '목포근대역사문화재생시민모임'

보존에서 활용까지 주민이 중심에 선다

목포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일본식 근대건축물이 남아 있는 도시 중 하나다.
하지만 무분별한 상업화와 개발계획으로 인해 원형 훼손과 문화재 훼손 사례가 잇따랐다.

이에 시민단체 ‘목포근대역사문화재생시민모임’은
단순한 반대운동을 넘어서 주민참여형 재생기획을 추진했다.

  • 근대건축물 목록화
  • 마을해설사 교육
  • 구 상가건물 활용 제안서 작성
  • 지역 청년과 협력한 리모델링 모델 제안

이 단체는 도시재생 뉴딜 사업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보존운동과 도시재생의 접점을 실질적으로 실현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5. 시민단체의 활동 방식 –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1) 기록과 조사 – 사라지기 전 반드시 남긴다

건축물이 철거되기 전, 사진, 도면, 증언, 기사, 설계도 등을 수집해
아카이빙 자료로 구축한다.
이는 향후 복원이나 역사교육, 전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2) 대중과의 소통 – 콘텐츠화와 여론 형성

설문조사, 거리전시, 팟캐스트, 영상 콘텐츠, 인스타그램 기록 계정 등을 활용해
대중이 쉽게 건축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 중심 콘텐츠를 제작한다.

3) 정책 개입 – 지자체와 제도 개선 협의

청원 제출, 의회 발언 기획, 문화재 지정 추진 등 행정에 개입하거나
보존지원 조례 제정 촉구, 법적 보호 장치 마련 등을 요구하는 활동을 펼친다.

4) 공간 재생 참여 – 운영 주체가 되다

보존 후 방치되는 공간이 아닌,
책방, 카페, 전시관, 시민회의 공간 등 ‘살아있는 공간’으로 재활용되도록 직접 운영하는 시민단체도 점차 늘고 있다.


한국의 건축물 보존 시민단체 요약

성북마을기록문화관 서울 성북구 주민기록, 사진채집, 구술채록 골목별 기록서 발간, 마을전시 기록을 통한 시민 인식 변화
해운대 옛역사 지키기 시민모임 부산 해운대 철거 저지, 언론 캠페인 역사 건물 철거 중단, 임시보존 빠른 대응이 보존 성패 좌우
목포근대역사문화재생시민모임 전남 목포 마을해설, 청년재생 기획 주민 참여 도시재생 안착 보존+재생의 실제 모델 구축
아현동 해방촌보존연대 서울 용산/마포 임시적 거주공간 보존운동 재개발 지연, 문화자치공간 운영 주거권과 보존의 교차
성수동 보존네트워크 서울 성수 공장건물 재해석, 공간 기획 성수창의산업벨트 설계 참여 산업유산 활용 사례
 

근현대 건축물은 단지 오래된 구조물이 아니다.
그 속에는 공동체의 정체성, 기억, 역사, 감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깊이 알고,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전문가나 관료가 아닌 ‘시민’들이다.

시민단체는 단지 반대만 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대안을 고민하고, 정책을 제안하며, 직접 운영을 시도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는 이들이다.
그 힘은 거대하지 않아도, 유연하고 지속적이다.
때로는 기록을 남기고, 때로는 공간을 지키고, 때로는 사람을 연결한다.

이제 보존운동은 더 이상 주변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 우리가 지나치는 골목에서도
어떤 건물은 오늘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있을지 모른다.

보존은 과거를 향한 집착이 아니라
공존을 위한 미래의 선택이다.
그 선택은 결국, 우리의 일상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