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이제는 기록이 필요한 시간
오래된 건물을 마주할 때면 문득 멈춰서게 된다.
그 건물은 말을 하지 않지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창틀에 남은 손때, 낡은 계단의 경사, 벽에 드리워진 빛의 방향은
우리가 잊고 있던 ‘어떤 시간’에 대한 흔적이기도 하다.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은 단지 오래된 구조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일제강점기의 질곡, 해방의 격변, 전쟁의 폐허, 산업화의 격류, 그리고 민주화의 열망까지
한 세기의 역동적인 사회 변화를 담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하지만 지금, 수많은 근현대 건축물이 재개발과 정비라는 이름 아래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많은 건물들이 기록되지도 않은 채로 사라진다.
기록되지 않은 건축물은 기억되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는 공간은 곧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제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만 남기자’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키든, 바꾸든, 허물든 간에 그 이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기록’이다.
기록은 선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책임이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직접 답사하고 조사한 여러 근현대 건축물을 통해
왜 지금이 기록이 필요한 시간인지,
기록은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록 없는 개발이 우리에게 어떤 상실을 남기는지를 체험 중심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1. 기록되지 않은 건축물, 사라진 도시의 기억
1-1. 서울 용산 효창동의 무허가 가옥 철거 현장
몇 해 전, 서울 용산구 효창동의 오래된 가옥 밀집지대를 우연히 방문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건물들과 1950~60년대 지어진 판잣집들이 혼재된 곳이었다.
동네 어르신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철도공사 직원들이 살던 ‘관사촌’이었고,
일부는 독립운동가 유족이 거주하던 집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2022년, 이 지역은 도시환경정비사업 구역으로 지정되어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채 대부분 철거되었다.
나는 개발 직전, 직접 현장을 방문해 일부 사진을 찍었지만
정확한 건축년도, 설계자, 사용 내역은 알 수 없었다.
“그냥 오래돼서 위험하대. 그래서 다 없앴지. 근데 우리 젊었을 땐 다 저기서 살았어.”
– 동네 주민 증언
기록되지 않은 건축물은 역사로 남지 않는다.
그리고 이 도시도, 그 기억도, 그렇게 지워진다.
2. 왜 기록이 필요한가?
2-1. 기록은 사라짐의 책임을 묻는 최소한의 수단
건축물은 문화재가 아니더라도,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공간적 삶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증거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 행정은 ‘문화재 등록’이라는 제도 아래서만 가치를 판단한다.
- 문화재가 아니면 철거 가능
- 기록이 없으면 보존의 논리도 성립 안 됨
- 시민 누구도 해당 건축물의 존재를 알 수 없음
기록은 단순히 자료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이 왜 존재했고,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누구와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묻는 사회적 행위다.
2-2. 기록은 보존의 논리를 가능하게 만든다
서울 강북의 한 신식 학교 건물은, 1930년대 지어진 붉은 벽돌 2층 구조였다.
오래되어 무너질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철거 예정이었지만,
동문회에서 당시 설계도면, 건립 기부자 목록, 사용 연혁, 교육 자료 등을 수집하여 시청에 제출했고
결국 보존 및 리모델링을 통한 활용 방안으로 전환되었다.
기록은 단지 ‘정보’가 아니라, 보존을 설득하는 논리이자 증거다.
3. 체험 중심: 기록을 직접 시도해보다
3-1. 군산 신흥동 적산가옥 기록 프로젝트
나는 지난해, 문화기록 전문 단체와 함께 군산의 적산가옥 중 한 채를 기록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상인이 살던 곳으로,
해방 이후 수차례 소유자가 바뀌며 주택과 병원, 창고로 쓰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록을 진행했다:
- 정면, 측면, 후면의 전체 사진
- 내부 도면화
- 구조별 재료 분석 (기와, 목재, 창문 틀)
- 지역 주민 구술 인터뷰
- 당시 도시 구조와 연계된 위치 분석
- 전 소유자의 가족 사진 및 일기 일부 확보
이 자료들은 모두 디지털화되어 군산시 아카이브에 기증되었고,
건물 철거 후에도 그 건물은 ‘기억 속의 건축물’로 남을 수 있었다.
기록을 통해, 철거조차 ‘기억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4.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4-1. 시민 누구나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록 방법
기록은 전문가만의 몫이 아니다.
건축을 잘 몰라도 누구나 다음의 방법으로 기본적인 건축 기록을 할 수 있다:
- 외벽과 정면, 창문, 지붕의 사진 촬영
- 건물 내부 구조의 간략한 스케치
- 건물 위치, 건축 연대 추정
-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사진, 생활 도구 확보
- 변화 전후 비교 사진
스마트폰 하나로도 충분히 가능한 ‘생활기록’은
도시 역사에 가장 생생한 자산이 될 수 있다.
4-2. 기록은 연결된다: 아카이브와 플랫폼
이러한 기록은 혼자 보관하는 데 그치면 안 된다.
- 시청 도시재생센터
- 지역 도서관
- 민간 아카이브 플랫폼
- 건축기록 시민단체
이런 곳에 디지털 파일로 등록하면
해당 건축물은 철거되더라도 공적 기억 속에 등록된 유산이 된다.
5. 사라짐을 넘어, 새로운 의미 부여를 위한 기록
5-1. 보존되지 않아도 기억되어야 할 건축물
서울 성북구의 한 경성시대 주택은 보존 대상이 아니었고,
결국 철거되었다. 하지만 철거 전 1년간 학생들과 주민들이 ‘집 사용기록’을 남겼고,
그 결과는 지금도 웹 아카이브에 남아 있다.
누군가 살았고, 꿈을 꿨고, 이야기를 나눈 집.
기록은 그 집의 2차 생애가 되는 셈이다.
5-2. 도시개발과 기록은 대립이 아니라 병행의 가치
많은 이들이 ‘개발 vs 보존’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다.
그러나 현실은 대부분 보존보다 개발이 우선이다.
그렇기에 기록은 보존이 실패한 시대에서 최소한 우리가 지켜야 할 책임이다.
기록은 건축물을 박물관 속으로 옮겨놓는 것이 아니다.
기록은 공간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남기고, 공유하고, 기억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한국의 건축물 기록의 필요성과 방법 요약
기록의 필요성 | 사라지는 건축물의 존재 의미 보존 | 서울 효창동, 군산 적산가옥 |
기록 방식 | 사진, 구조 스케치, 인터뷰, 위치 정보 | 시민 개인 기록, 공동체 프로젝트 |
기록 주체 | 누구나 가능 (시민, 단체, 전문가) | 대전 도시재생 청년기록단 |
기록 활용 | 보존 주장 근거, 디지털 아카이브, 전시 | 서울 강북 신식학교 리모델링 결정 사례 |
기록의 효과 | 철거 이후에도 존재의 기억 유지 가능 | 웹기록으로 남은 성북구 가옥 사례 |
우리는 흔히 사라지는 것에 무력해진다.
하지만 모든 사라짐이 ‘잊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록은 사라짐을 받아들이되, 그 의미를 지우지 않기 위한 가장 인간적인 행위다.
근현대 건축물은 지금도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무런 기록도 없이, 그저 흙더미와 폐자재로 변한다.
그러나 단 한 장의 사진, 한 줄의 메모, 몇 개의 인터뷰만으로도
그 건축물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는다.
우리가 기록하지 않으면,
그 공간은 단지 ‘없어진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기록하면,
그 공간은 ‘살아 있었던 것’으로 남을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근현대 건축물에 대해 기록해야 할 시간이다.
보존을 위한 첫걸음이자, 기억의 마지막 마지노선으로서의 기록.
이제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그 오래된 건물 앞에서
우리가 펜을 들고, 셔터를 누르고, 귀를 기울여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