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건축물 보존, 왜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가
도시의 변화는 빠르다.
건물 하나가 철거되면, 그 자리는 어느새 새 아파트나 상업 건물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 철거된 건물이 단지 낡았다는 이유로 사라졌다면,
우리는 단순한 공간을 잃은 것이 아니라
시간, 기억, 삶의 방식을 함께 잃는 셈이다.
대한민국의 근현대 건축물은
식민지 시대, 해방기, 산업화기를 거치며
이 땅에서 살아낸 사람들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이 건물들은 전통 한옥처럼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고,
현대 건축물처럼 세련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시대적 맥락, 지역성, 생활사의 단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문제는 이 근현대 건축물이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로 등록된 건축물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보존 시스템은 느슨하며,
개발 논리는 그 어떤 유산보다 빠르다.
이제는 질문해야 한다.
“지금 지키지 않으면, 과연 언제 지킬 수 있을까?”
지금부터 우리는 그 이유를, 실제 현장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왜 마지막 기회일 수밖에 없는지,
어떤 조치가 시급히 필요한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1. 근현대 건축물의 시간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1-1. ‘등록문화재’조차 되지 못하는 현실
대한민국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 근현대 건축물은
2024년 기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수가 1,200건 남짓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수치가 전체 근현대 건축물의 10%도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건축 연대가 비교적 가까워 ‘문화재’로 보지 않음
- 등록 신청을 위한 절차가 까다롭고 시간 소요 많음
- 등록 후에도 유지 비용이 소유주 부담으로 돌아감
보존의 사각지대는 결국 철거의 대상으로 직결된다.
나는 2023년 초, 대전 중앙로 인근의 한 적산가옥에 갔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 유통 상인의 집무실로 쓰였던 곳이지만,
지금은 건축허가 표지판만 남겨둔 채 공사 예정 상태였다.
등록 신청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건물은 보호 대상이 아니죠’라는 말이 그곳 주민에게서 나왔다.
1-2. 10년 내 사라질 위기의 건축물들
2020년 이후, 전국 지자체가 작성한 도시재생 계획 중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목포, 군산 등 주요 도시의 근현대 건축물 중
50% 이상이 재개발·철거 우선 대상지로 지정된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목포 유달산 아래의 근대 골목,
군산 내항 인근의 상업가옥,
부산 초량동의 적산가옥들은
지금 보존 결정을 하지 않으면 10년 내에 모두 사라질 수 있다.
건축물은 한 번 사라지면,
복원도, 재현도, 교육적 가치도 그 즉시 사라진다.
“보존은 나중에 해도 되지 않느냐”는 인식은
시간과 싸우는 현실을 오해한 것이다.
2. 왜 지금이 '보존의 결정적 시점'인가?
2-1. 1세대 소유주와 기억의 단절
근현대 건축물의 상당수는
1세대 혹은 2세대 가족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지금,
그 건물의 의미나 관리 의지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한 1950년대 건물 소유자 A씨는
“이 건물은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말기에 세운 가옥이에요.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살지만,
자녀들은 다 신도시로 나가 있고,
여기 건물은 그냥 ‘정리해야 할 유산’ 정도로 여깁니다”라고 말했다.
기억이 끊기면, 공간도 기능을 잃는다.
지금 이 세대가 사라지면,
건축물이 담고 있는 삶의 서사, 시대의 맥락, 증언자로서의 기능이
한순간에 사라지게 된다.
2-2. 도시재생 정책의 전환 시기
2020년대 초반부터 정부와 지자체는
도시재생 정책을 ‘재개발 중심’에서 ‘보존과 활용’ 중심으로 조금씩 전환하고 있다.
이 흐름은 기회다.
현재는 일부 지역(예: 목포, 군산, 대구 등)에만 적용되고 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적극적인 보존 제안과 시민 참여 모델이 확산된다면
정책 방향을 전국 단위로 확대할 수 있다.
정책이 열려 있는 이 시기를 놓친다면,
다시는 ‘보존 중심’의 물결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3. 현장의 경험 – 사라짐과 기억의 경계에서
3-1. 서울 성북동의 붉은 벽돌집, 철거의 순간
2023년 가을, 나는 성북동에서 철거 중인 한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
이 집은 해방 직후 피난민 가족이 정착하며 지은 집으로,
도시계획 당시에는 보존 대상으로 지정되었던 곳이다.
하지만
법적 등록은 미완,
매매 과정에서 보호 의무 명시 없음,
보존 지원금도 미지급 상태였다.
결국,
소유주가 “이 집은 우리 가족에게는 의미 있지만,
외부에서는 아무 관심도 없으니까요”라는 말과 함께
개발사에 매각했다.
그 철거 장면을 보며 나는
기억의 연장이 외부의 관심 없이 유지될 수 없음을 실감했다.
3-2. 군산 선교사 사택의 리모델링 성공기
반면 군산에서는
지역 단체와 지자체, 소유주가 협력해
1900년대 선교사 사택을 리모델링한 사례가 있다.
적극적인 시민 참여로
‘군산 건축문화 해설단’이 조직되고,
보존 가치 평가를 통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소규모 전시장과 시민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사례는
“지금 우리가 결정하고 실행하면 보존은 가능하다”는
가장 현실적인 예시다.
4. 보존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
4-1. 도시가 완전히 바뀌기 전에
2025년 현재,
국토교통부는 2030년까지 전국 120개 지역을
‘집중 도시재편지역’으로 선정하고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 구역 안에는
수많은 근현대 건축물들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문화유산 여부를 묻는 과정은 없다.
도시가 재편되면,
건축물은 단지 기능 중심의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이제는 재개발 계획이 현실화되기 전에
보존 대상 선별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며,
지금 이 시점에서 이를 추진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도시 구조의 단절이 발생할 수 있다.
4-2. 시민의 인식이 높아진 지금
최근 몇 년 사이,
SNS, 유튜브, 블로그 등을 통해
근현대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근대 골목 산책’, ‘적산가옥 카페’, ‘건축유산 스토리텔링’ 콘텐츠는
2030 세대를 중심으로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시민의 관심과 참여도가 높아진 지금은
보존을 위한 사회적 여론 형성에 최적의 시기다.
이 시기를 놓친다면,
시민의 참여는 흩어지고,
정책의 동력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이유 요약
구분 | 내용 | 현재 상황 | 시급성 |
제도적 한계 | 등록문화재 중심 보호 | 전체 건축물 중 일부만 보호 | 비등록 건물 급속히 철거 |
세대 교체 | 소유자 고령화·자녀 비관심 | 기억 단절, 보존 의지 약화 | 다음 세대로 전달 어려움 |
개발 압박 | 재개발 사업 가속화 | 문화적 평가 없이 철거 진행 | 보존 대상조차 식별 안 됨 |
시민 인식 | 관심 증가, 참여 확산 중 | SNS·미디어 중심의 확산 | 정책 반영 시기 지금 |
정책 변화 | 도시재생 패러다임 변화 초기 | 일부 도시 중심 시범 운영 | 전국 확산 가능성 지금뿐 |
근현대 건축물은 우리 사회의 격동과 전환의 시간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를 넘기면,
그 공간은 단지 '기억 속 사진 한 장'으로만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보존은 ‘언젠가’의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결정은 정부의 법령 개정일 수도 있고,
지자체의 재정 투입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기록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근현대 건축물은,
그 자체로 ‘완결된 문화재’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보존하고 해석하고 재해석해야
미래 세대가 만날 수 있는 유산이 된다.
마지막 기회는
‘내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기억은 영원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