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건축물은 단순히 낡은 건물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겪어온 격변의 100년 역사를 담아내는 산 증인이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과정 속에서 세워진 건축물들은 단순한 건축 자산을 넘어 집단적 기억과 도시 정체성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물이 빠른 도시 개발과 상업화 물결 속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도 사실이다.
서울 종로의 옛 근대 은행 건물이 철거될 때 현장에서 본 시민들은 “돌아올 수 없는 역사가 허물어졌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반대로 군산, 목포, 대구 등 일부 지방 도시는 근현대 건축물을 전략적으로 보존하여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며, 지역의 문화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자체별 보존 정책은 큰 차이를 보인다. 어떤 지역은 ‘문화재 등록’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넘어,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과 관광 상품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반면, 또 다른 지역은 법적 장치의 미비와 예산 부족으로 건물 방치 문제를 겪고 있다. 본 글에서는 주요 지자체별 근현대 건축물 보존 정책을 비교 분석하고, 이를 통해 한국 건축문화 보존의 현실과 과제를 짚어본다.
1. 서울시 – 제도화된 보존 정책과 현실적 한계
1-1. ‘서울 미래유산’ 사업
서울시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근현대 건축물 보존의 필요성을 제도화했다. 2012년부터 시작된 ‘서울 미래유산’ 프로젝트는 단순히 등록문화재만이 아니라, 근현대 건축물과 생활문화 공간까지 포함해 보존 대상을 확대했다. 덕수궁 돌담길, 세운상가, 종로의 옛 은행 건물 등이 대표적이다.
1-2. 관광과 보존의 충돌
그러나 서울은 개발 압력이 가장 큰 도시다. 종로 일대의 일부 근대 건물은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면서 보존보다는 철거가 우선되기도 했다. 필자가 직접 찾은 세운상가 옥상 전망대에서는 도시 개발과 보존이 충돌하는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쪽에서는 철거 중인 건물 잔해가 보였고, 다른 쪽에서는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공간이 있었다. 이 장면은 서울의 보존 정책이 안고 있는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 군산시 – 근현대 건축물 보존의 모범 사례
2-1. 근대문화도시 지정
군산은 전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근현대 건축물 보존 사례로 꼽힌다. 2008년 근대문화도시로 지정된 이후, 구 조선은행 본점, 히로쓰 가옥, 구 군산세관 등 30여 채 건축물이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2-2. 주민 참여형 보존
군산의 특징은 보존 과정에서 주민 참여가 활발했다는 점이다. 필자가 군산 히로쓰 가옥을 답사했을 때, 건물 안내를 맡은 이는 전문 해설사가 아니라 지역 주민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 집 주변에서 놀던 기억을 생생히 들려주었다. 이처럼 주민이 직접 해설을 맡는 방식은 건축물의 가치를 더 ‘살아 있는 역사’로 느끼게 한다.
2-3. 관광 자원화의 성과
군산 근대 건축물은 현재 지역 관광의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 주말이면 구 조선은행 건물 앞에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근현대 건축물이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경제적 자산으로도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목포시 – 원도심 재생과 건축물 보존
3-1. 근대역사문화공간 사업
목포는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사업’을 통해 원도심에 위치한 일본식 가옥, 옛 은행 건물, 학교 건물을 보존하고 있다. 이 사업은 단순히 건물을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건축물과 골목길을 하나의 문화 경관으로 묶어낸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3-2. 스토리텔링 결합
목포는 ‘목포 근대 역사관’을 중심으로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필자가 참여한 해설 프로그램에서 가이드는 단순한 건물 설명을 넘어서, “이 건물에서 당시 상인들이 겪었던 세금 갈등”과 같은 생활사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관광객에게 건축물이 단순한 유산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품은 공간임을 느끼게 한다.
4. 대구시 – 산업화 시대 건축물 보존
4-1. 근대 골목 투어
대구는 일찍이 ‘근대골목투어’를 개발해 성공을 거두었다. 구 대구제일교회, 구 대구약전골목, 구 계산성당 등이 주요 코스다. 특히 근대 건축물과 한국전쟁, 산업화의 흔적을 연결해 해설하는 점이 독창적이다.
4-2. 산업화 건축물 보존의 과제
하지만 대구의 보존은 종종 ‘관광 상품화’에 치중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산업화 시기 세워진 공장 건물이나 철도 관사 같은 건축물은 여전히 방치되어 있다. 필자가 대구 칠성동에서 본 낡은 섬유공장 건물은 벽돌이 무너져 내릴 위기였지만, 안내판 하나조차 설치되지 않았다. 이는 대구 보존 정책의 사각지대를 드러낸다.
5. 부산시 – 근대 항구 도시의 흔적 보존
5-1. 개항기 건축물 보존
부산은 항구 도시라는 특성상 개항기 건축물이 다수 남아 있다. 구 일본영사관, 초량동 일본식 가옥, 부산 근대역사관 건물 등이 대표적이다. 부산시는 이를 활용해 ‘근대역사문화벨트’를 조성하고 있다.
5-2. 활용과 보존의 균형
그러나 부산 역시 재개발 압력이 큰 도시다. 일부 건축물은 상업지구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철거 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필자가 찾은 초량동 일본식 가옥 일대에서는, 한편에서 주민이 “이 집은 꼭 남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주민은 “관광객만 몰려와서 불편하다”며 철거를 원했다. 이는 보존 정책이 단순히 건축물만이 아니라 주민 생활과의 조화를 고민해야 함을 보여준다.
6. 지자체별 비교 분석
6-1. 제도적 차이
- 서울: 제도화는 선도적이지만 개발 압력 큼.
- 군산: 주민 참여형 보존 성공 사례.
- 목포: 건물+거리 통합 경관 재생.
- 대구: 관광 상품화 성공, 그러나 산업화 건축물 보존 미흡.
- 부산: 항구도시 특화, 그러나 주민 생활과 충돌.
6-2. 공통 과제
- 예산 확보 문제 – 대부분 지자체가 장기적 보존보다는 단기 사업 위주.
- 주민과의 갈등 – 관광객 유입이 생활 불편으로 이어지기도 함.
- 건축물 가치 평가 – 아직 많은 근현대 건축물이 미등록 상태로 방치됨.
지자체 | 주요 정책 | 특징 | 한계 |
서울 | 서울 미래유산 | 제도화 선도, 다양한 공간 포함 | 개발 압력으로 철거 빈번 |
군산 | 근대문화도시 지정 | 주민 참여·관광 성공 | 상업화 논란 가능성 |
목포 | 근대역사문화공간 사업 | 거리+건축물 통합 보존 | 재정 의존도 높음 |
대구 | 근대골목투어 | 관광 프로그램 성공 | 산업화 건축물 방치 |
부산 | 근대역사문화벨트 | 항구도시 특화 보존 | 주민 생활과 갈등 |
7. 구체 사례로 본 지자체별 보존 현실
7-1. 서울 – ‘미래유산’의 빛과 그림자
서울시는 2025년 현재 약 500여 곳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이 중에는 건축물뿐 아니라, 골목길·시장·다리 등도 포함된다. 그러나 문제는 관리 예산이다. 실제 2024년 기준, 서울시의 미래유산 관리 예산은 약 120억 원 수준이었으나, 지정 대상이 방대해 실질적인 보존 활동은 특정 건물 위주로 집중되었다.
종로구에 위치한 구 상업은행 건물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인근 재개발 계획과 충돌하면서 한때 철거 위기에 몰렸다. 현장에서 만난 인근 상인은 “관광객들이 건물을 보러 오긴 하지만, 주변이 개발되지 않으면 상권이 죽는다”라며 보존보다 생활의 어려움을 먼저 호소했다. 이는 서울의 보존 정책이 제도적 틀을 갖추었음에도 개발과 생활 사이의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7-2. 군산 – 주민이 직접 지켜낸 건물들
군산시는 근현대 건축물 보존 정책으로 전국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다. 2025년 기준 군산 원도심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은 33개소에 이른다.
구 조선은행 본점은 일제강점기 금융의 중심지였으나, 한때 방치되며 붕괴 위기까지 겪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군산의 상징을 지켜야 한다”며 청원 운동을 벌였고, 시와 문화재청이 협력해 보존 공사가 진행됐다. 현재는 전시·체험 공간으로 활용되며, 연간 5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만난 한 주민 해설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건물은 단순히 옛날 은행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눈물로 돈을 맡기고, 빚을 지던 곳이기도 하죠. 지금은 관광객에게 사진 명소지만, 저희에게는 삶의 기록이에요.”
군산의 사례는 주민 참여형 보존이 건물의 생명력을 얼마나 오래 이어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7-3. 목포 – 근대 거리 전체를 문화재로
목포는 2019년부터 시작된 ‘근대역사문화공간 사업’의 대표 도시 중 하나다. 목포 원도심의 39만㎡ 구역이 통째로 보존·재생 구역으로 묶였으며, 이 안에는 일본식 가옥 20여 채, 근대 학교 건물, 옛 은행 건물이 포함된다.
목포시는 매년 약 100억 원 이상을 투입해 건물 보수와 골목길 정비를 병행하고 있다. 필자가 참여한 목포 해설 프로그램에서, 가이드는 한 일본식 가옥 앞에서 “이 집은 강제로 터를 빼앗긴 한국인 상인의 눈물 위에 세워졌다”고 설명했다. 순간 관광객들은 단순히 ‘이국적인 건물’이 아니라 억압과 저항의 역사를 마주한 듯 숙연해졌다.
목포의 정책은 스토리텔링 결합형 보존이라는 점에서 다른 지자체와 차별된다.
7-4. 대구 – 산업화 건축물 보존의 과제
대구는 2007년부터 시작된 ‘근대골목투어’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매년 2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 투어에 참여하며,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관광이 되는 건물’만 집중 조명된다는 점이다.
칠성동의 한 섬유공장 건물은 여전히 방치 상태로, 건물 내부는 붕괴 위험 때문에 출입이 금지되었다. 현장에서 만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우리 아버지가 평생을 일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흉물로 남아 있죠. 누군가는 이곳의 역사를 기록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구의 보존 정책은 관광 자원화에 편중되어 있어, 산업화 건축물 보존이라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7-5. 부산 – 항구도시 보존과 주민 갈등
부산은 개항 이후 남겨진 일본식 건물과 영사관 건물이 많다. 부산시는 이를 ‘근대역사문화벨트’로 묶어 관광 자원화했으나, 동시에 재개발 갈등도 거세다.
초량동 일본식 가옥 일대를 답사했을 때, 한 주민은 “이 집 덕분에 관광객이 오니 좋다”고 했지만, 다른 주민은 “밤늦게까지 시끄럽고 생활 불편이 크다”고 토로했다. 이는 건축물 보존 정책이 단순히 건물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주민의 일상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가 핵심 과제임을 보여준다.
8. 향후 정책 방향성
8-1. 국가 차원의 통합 관리 필요
현재 근현대 건축물 보존은 지자체별로 각자 진행되고 있어, 지역 간 격차가 크다. 국가 차원에서 예산 지원과 정책 기준의 통합이 필요하다. 예컨대 문화재청이 주도하는 ‘등록문화재 제도’를 보완하여, 지방 도시의 미등록 건축물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8-2. 주민 참여와 생활 친화형 보존
군산의 사례에서 보듯, 주민이 직접 해설사로 나서고, 보존 운동에 참여할 때 건축물은 더 오래 살아남는다. 따라서 보존 정책은 주민 교육·참여 프로그램을 필수 요소로 포함해야 한다.
8-3. 디지털 기록화와 교육 연계
최근 일부 지자체는 드론 촬영, 3D 스캐닝을 통해 건축물을 디지털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이는 향후 건물이 사라지더라도 가상 공간에서 후손이 체험할 수 있는 자산이 된다. 또한 학교 교육과 연계하여, 학생들이 근현대 건축물을 직접 답사하고 기록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단순히 유산을 ‘구경하는 대상’에서 ‘직접 체험하는 역사’로 승화시킬 수 있다.
근현대 건축물 보존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지키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집단의 기억을 후대에 전하는 일이며, 동시에 지역 경제와 관광을 활성화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서울, 군산, 목포, 대구, 부산의 사례는 각각 다른 장점과 한계를 보여준다. 군산은 주민 참여를, 목포는 거리와 건축물의 통합적 보존을, 서울은 제도화를, 대구는 관광 연계를, 부산은 항구도시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예산 부족, 주민 갈등, 개발 압력이라는 난제를 안고 있다.
앞으로는 지자체별로 차별화된 보존 정책을 유지하되, 국가 차원의 종합적인 지원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근현대 건축물이 단순히 흘려보낼 흔적이 아니라, 후손에게 전할 도시의 유산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근현대 건축물 보존 정책은 지자체마다 색깔이 다르지만, 공통 과제는 뚜렷하다. 바로 예산 부족, 주민 생활과의 갈등, 관광 자원화 편중이다. 앞으로는 지자체가 단순히 ‘보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생활·경제를 아우르는 종합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서울의 제도화, 군산의 주민 참여, 목포의 스토리텔링, 대구의 관광 연계, 부산의 항구도시 보존 방식은 각각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장점을 상호 공유하고 국가 차원의 지원을 결합한다면, 근현대 건축물은 후손에게 전할 살아 있는 교과서이자, 지역의 경제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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