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고층 빌딩과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 속에는 시간의 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근현대 건축물들이 조용히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으며, 보존되지 않은 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기자 출신 필자의 시선으로, 직접 발로 뛰며 만난 서울의 숨겨진 근현대 건축물들을 소개하고, 그 안에 깃든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조명해보려 한다. 단순한 건축물 소개를 넘어, ‘산책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간과 시간 속을 걸으며 마주친 풍경들을 담담히 풀어내려한다.
근현대 건축물은 단순한 벽돌과 기와가 아니라, 시대의 정서와 사람들의 기억이 머문 공간이다. 보존이라는 단어가 단지 외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 산책을 통해 체감할 수 있다. 서울의 겹겹이 쌓인 시간 속을 걸으며 그 흔적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면, 지금 이 여정에 동행해 보자.
1. 종로구 익선동 – 모던함 속의 고요한 저항의 흔적
1930년대 한옥과 일본식 건축이 공존하는 골목
익선동은 최근 힙한 거리로 각광받고 있지만, 그 중심을 벗어난 골목에는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과 일본식 가옥이 공존하고 있다. 필자는 종로3가역에서 내려 익선동 후미진 골목으로 걸었다. 낡은 지붕에 햇빛이 부서지는 풍경은 묘하게 따뜻했고, 철제 창틀과 목조 창호가 나란히 배치된 이질적인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주민들은 아직도 이곳에서 거주하며,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 집이야”라며 웃었다.
근대기 자영업자의 삶이 묻어 있는 건물들
이 골목의 매력은 외관보다 내부에 있다. 일부 주택은 가게로 개조되었는데, 내부에 들어가면 80년 전 가게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 곳도 있다. 약국으로 사용되던 공간은 지금은 찻집으로 바뀌었지만, 약품을 보관하던 선반과 일본식 미닫이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방문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2. 중구 필동 – 근대 종교 건축의 교차점
1920년대 개신교 교회, 조선식 지붕과 고딕 창문
필동 일대는 국립극장이 있어 예술지구로 알려졌지만, 그 안쪽 골목에는 1920년대 건립된 근대 교회 건축물이 숨어 있다. 이 교회의 외형은 고딕 양식의 창과 조선식 기와지붕이 혼재되어 있었다. 목사님께 허락을 받아 내부로 들어가 보니, 좁은 통로 끝에는 손때가 묻은 예배대가 그대로 있었고, 아직도 일부 노년 신자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건축적 혼종성에 담긴 역사적 맥락
이 건축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교회를 허가받기 위해 일본식 양식 일부를 수용해야 했던 시대적 산물이다. 건축가는 당시 순수한 기독교 정신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타협만을 했다고 한다. 건물의 벽돌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쌓은 것으로, 이질적인 양식의 조합은 건축이라는 언어로 저항을 표현한 결과다.
3. 성북구 성북동 – 잊혀진 근대 예술가의 자취
윤동주가 걸었던 골목, 그 끝에 선 한적한 주택
성북동은 예술가들의 거처로 알려져 있지만, 상업화되지 않은 지역에는 1950년대 작가들이 실제 거주하던 공간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필자는 성북로를 따라 올라가며 윤동주 시인이 자주 거닐던 골목을 걸었다. 그 끝자락, 낡은 양옥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초인종 대신 나무 문패가 달려 있었고, 벽에는 “여기서 詩가 태어났다”는 작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근현대 건축물 속 예술의 흔적
그 집은 현재 작고한 수채화 화가의 자택이었다. 후손이 직접 문을 열어주며, 내부를 보여주었다. 실내는 목재 바닥과 벽난로, 북향 창문이 특징적이었다. 자연광을 중요시했던 당시 예술가의 삶이 건축에 스며 있었고, 천장에 남은 붓 자국과 스케치 흔적은 이곳이 단순한 주택이 아니라 창작 공간이었음을 증명했다.
4. 동작구 흑석동 – 근대 교육기관의 흔적
흑석동 일대의 일제시대 학교 건물
한강변을 따라 흑석동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교육을 위해 세워졌던 학교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은 현재는 사용되지 않지만, 과거에는 초등학교였다고 한다. 건물 외벽에는 ‘조선총독부교육청’이라는 문구가 미세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억압된 현실을 실감케 한다.
교육의 장소에서 기억의 장소로
이곳은 현재 마을 주민들에 의해 ‘근대기 기억의 장소’로 소소하게 관리되고 있다.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자, 예전 교실 창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의자도 일부 그대로였고, 칠판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마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릴 듯한 공간. 그저 폐건물이 아니라, 기억이 머무는 건축물이었다.
장소건축물 특징시대 내용 요약
익선동 | 일본식+한옥 혼합 주택 | 1930년대 | 상업화 이면의 원형 보존, 자영업자 흔적 |
필동 | 고딕+조선식 교회 건물 | 1920년대 | 종교 자유를 위한 건축적 타협과 저항 |
성북동 | 예술가 주택 (양옥) | 1950년대 | 작가의 삶과 건축이 공존한 공간 |
흑석동 | 조선시대 학교 건물 | 일제강점기 | 교육기관에서 기억 공간으로 변화 |
서울은 빠르게 바뀌는 도시이지만, 그 안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근현대 건축물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대부분은 대대적인 보존 없이 방치되거나, 재개발 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문화와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는 <기록>이다.
이 글에서 소개한 장소들은 관광지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것은 직접 걷고, 보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이다.
서울의 근현대 건축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그곳을 ‘걷는’ 일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기억을 잇는 행위’다.
보존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다. 이 건축물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또 다른 골목을 걷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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