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물

근현대 건축물, 후손에게 전할 유산인가 흘려보낼 흔적인가

헤이 봄 2025. 8. 22. 01:00

근현대 건축물은 우리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래된 벽돌 담과 낡은 창문, 그 위에 드리운 세월의 흔적은 때로는 무심히 지나가는 풍경에 불과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시대를 증언하는 귀중한 기록으로 다가온다. 2025년 현재, 대한민국 곳곳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 지어진 근현대 건축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을 대하는 시선은 극과 극이다. 일부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반면, 다수는 개발이라는 이름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왔다.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근현대 건축물이 과연 ‘유산’으로서 보존되어야 할 대상인가, 아니면 도시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레 흘려보낼 흔적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 인식,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어떤 이야기를 물려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서울, 부산, 대구, 군산 등 주요 지역에 남아 있는 근현대 건축물 사례를 살펴보고, 그 세부 연혁과 보존 운동의 과정을 정리한다. 또한 실제 현장을 찾은 시민·전문가 인터뷰를 발췌하여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연 근현대 건축물이 ‘후손에게 전할 유산’인지, 아니면 ‘흘려보낼 흔적’인지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1. 서울 – 경성의 흔적을 간직한 공간들

1-1. 서울역 (구 경성역)

  • 연혁
    • 1925년: 일제강점기, ‘경성역’으로 개장
    • 1945년: 광복 후 ‘서울역’으로 명칭 변경
    • 1981년: KTX 이전 전까지 수도권 교통의 중심
    • 2004년: 신 서울역 개장 이후 구역사 기능 축소
    • 2011년: 문화역서울 284로 복원·재개관
  • 보존 운동
    구역사 철거 논의가 있던 1990년대 말, 시민단체와 문화재 전문가들이 “근현대사의 상징 공간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결국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이후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통해 전시장, 공연장 등으로 활용되며 다시 살아났다.
  • 현장 인터뷰 발췌
    “서울역은 단순히 기차를 타던 곳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상경하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건물이 없었다면 제 가족의 이야기도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 (50대 시민, 현장 방문 중 인터뷰)

1-2. 옛 조선총독부 건물 터 (현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 연혁
    • 1926년: 일본에 의해 건립, 식민 지배의 상징으로 사용
    •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정부기관 건물로 이용
    •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환
    • 1995년: 광복 50주년, 시민 여론에 따라 철거
  • 보존 논란
    당시 보존 여부를 둘러싸고 “식민 잔재를 두어선 안 된다” vs.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라는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결국 철거되었지만, 이는 ‘흔적을 남길 것인가, 지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진 상징적 사건이었다.
  • 현장 인터뷰 발췌
    “철거가 아쉽습니다. 건물이 남아 있었다면, 그 자체로 식민의 아픔을 증언할 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그 당시 분위기에서는 지우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죠.” (역사학자, 2010년 학술 토론회 중)

2. 부산 – 항구 도시의 기억

2-1. 부산근대역사관 (구 일본 영사관)

  • 연혁
    • 1920년: 일본 영사관으로 건립
    • 1945년 이후: 미군정청, 시청사 등으로 활용
    • 2003년: 리모델링 후 부산근대역사관 개관
  • 보존 운동
    1990년대 철거 논의가 있었으나, 부산 시민단체와 학계가 “항구도시 부산의 정체성을 담은 건물”이라 주장하며 보존 운동을 전개했다. 현재는 부산의 근현대사를 전시하는 대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 현장 인터뷰 발췌
    “외관은 일본식이지만, 그 안에는 부산 시민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습니다. 단순히 남의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담은 공간입니다.” (부산근대역사관 학예연구사)

2-2. 초량동 이바구길 – 피란수도의 흔적

  • 연혁
    •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피란민 정착
    • 1960~70년대: 달동네로 확산
    • 2010년 이후: 도시재생사업으로 보존·관광 자원화
  • 보존 과정
    개발로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지역 주민과 청년 예술가들의 협력으로 ‘이바구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오래된 가옥과 건물을 리모델링해 카페, 전시장, 마을 박물관으로 재탄생시켰다.
  • 현장 인터뷰 발췌
    “할머니가 전쟁통에 여기서 피란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그 집을 카페로 바꿨지만, 벽돌 하나하나가 그 시절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이바구길 카페 운영자)

3. 대구 – 산업화의 흔적

3-1. 계산동 성당

  • 연혁
    • 1899년: 프랑스 신부에 의해 건립, 한국 천주교 초기 성당 중 하나
    • 1900~1950년대: 지역 신앙 공동체 중심
    • 1981년: 사적 제290호 지정
  • 보존 운동
    1970년대 개발 붐 속에서도 종교계와 지역 사회의 강력한 보존 요구로 살아남았다. 현재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현장 인터뷰 발췌
    “성당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신앙의 힘도 있었지만, 도시의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대구 사람들은 이 성당을 ‘우리 도시의 얼굴’로 여겼습니다.” (대구 교구 신부)

3-2. 대구 제일교회 예배당

  • 연혁
    • 1933년: 건축, 모더니즘 양식 반영
    • 6·25전쟁 당시 임시 피란민 수용소 역할
    • 2009년: 등록문화재 제264호 지정
  • 보존 과정
    철거 위기에 있었으나, 건축학계와 교계의 노력으로 문화재 등록에 성공했다. 현재는 대구의 근대 건축물 탐방 코스로 자리 잡았다.

4. 군산 – ‘시간여행 도시’의 상징

4-1. 옛 군산세관

  • 연혁
    • 1908년: 일본에 의해 건립, 서양식 벽돌 건물
    • 1945년 이후: 관세청 산하 기관으로 운영
    • 1990년대: 근대역사박물관과 연계하여 관광지화
  • 보존 운동
    세관 건물 철거 논의가 있었으나, 군산 시민들이 ‘도시의 얼굴’로 지켜냈다. 이후 근대 건축물 보존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 현장 인터뷰 발췌
    “세관은 단순히 일본 건물이 아니라, 군산이 어떤 도시였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건물이 없다면 군산의 이야기도 사라졌을 겁니다.” (군산시 근대역사관 해설사)

4-2. 히로쓰 가옥

  • 연혁
    • 1920년대: 일본인 지주 히로쓰의 가옥으로 건립
    • 1945년 이후: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
    • 2000년대 이후: 관광지 및 영화 촬영지로 활용
  • 보존 운동
    한때 방치되어 폐가처럼 변했으나, 지역 청년 단체가 보존 운동을 벌여 시에서 매입했다. 현재는 군산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 관광지다.
  • 현장 인터뷰 발췌
    “처음 이 집을 봤을 때는 무섭고 음산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알게 되니 오히려 더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군산 청년문화단체 회원)

5. 근현대 건축물 보존의 사회적 의미

5-1. 개발 vs. 보존

대한민국은 압축적 성장을 경험하면서 ‘개발’이 곧 ‘진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근현대 건축물이 사라졌다. 이제는 보존을 통해 지역 정체성을 지키고,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5-2. 시민의 힘

서울역, 군산세관, 부산 이바구길 등은 모두 시민들의 보존 운동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건축물 보존은 제도적 장치만으로는 부족하며, 지역 주민의 애정과 참여가 핵심 동력임을 보여준다.

 

지역 건축물 연혁 보존 운동 과정 현재 활용
서울 구 서울역 1925년 건립 철거 위기 → 시민운동 → 복원 문화역서울 284
서울 옛 조선총독부 1926년 건립 보존 논란 끝 철거 터만 남음
부산 일본 영사관 1920년 건립 시민단체 반대 → 보존 성공 부산근대역사관
부산 이바구길 1950년대 피란촌 주민·청년 예술가 보존 운동 도시재생·관광지
대구 계산동 성당 1899년 건립 종교·시민 보존 운동 사적 제290호
대구 제일교회 1933년 건립 건축학계·교계 노력 등록문화재
군산 군산세관 1908년 건립 시민 운동으로 보존 근대역사박물관
군산 히로쓰 가옥 1920년대 청년단체 보존 운동 관광지, 영화 촬영
 

근현대 건축물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이 아니다. 그곳에는 한 시대의 정치적 상황, 사회적 변화, 개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울역은 산업화의 출발점이었고, 부산 이바구길은 전쟁의 아픔을 간직했으며, 군산세관은 제국주의의 흔적과 지역 경제의 기억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갈림길에 서 있다. 어떤 건물은 보존되어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하지만, 또 다른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는 곧 우리가 어떤 미래를 후손에게 남길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근현대 건축물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다. 건물은 말이 없지만, 그 벽과 창, 기둥은 세월 속 이야기를 담아 후대에 전한다. 지금 우리가 지키지 않는다면, 후손은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근현대 건축물은 유산으로서 반드시 보존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건축학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억과 정체성을 담은 공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