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건축물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얼굴이며, 한 사회의 기억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붉은 벽돌로 쌓은 은행 건물, 일제강점기의 관공서, 산업화 시기의 연립주택, 70~80년대식 양옥 주택까지. 이 모든 공간은 각기 다른 시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을 입고 존재해왔다. 그리고 지금, 그 대부분이 철거되거나 방치되어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정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문화재청은 매년 수백억 원의 예산을 집행하고 있고, 지자체들도 지역 자산 발굴과 도시재생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마주하는 근현대 건축물의 현실은, 종종 ‘정부의 그림자조차 미치지 않는’ 상태다.
나는 실제로 몇 개의 근현대 건축물 보존 현장을 탐방하고, 담당 공무원과의 인터뷰, 문화재청의 자료, 등록문화재 지정 과정 등을 추적하면서 이 글을 구성했다. 현장의 현실과 제도의 괴리를 좁히고, 우리가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1. 정부가 보호하는 건물은 ‘문화재’뿐인가?
등록문화재란 무엇인가?
문화재청은 2001년부터 '등록문화재'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기존에는 국보나 보물처럼 유물·유적 중심이었지만, 등록문화재는 19세기 말부터 한국전쟁 이전에 지어진 근현대 건축물도 보존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등록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점이다.
필자는 2024년 여름, 서울 동작구의 한 근현대 건축물(1959년 준공, 지역 상인회 회관)이 등록문화재 신청을 추진 중인 현장을 찾았다. 건물 외형은 붉은 벽돌에 나무 창틀이었고, 내부 구조는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재청에서 보낸 1차 회신은 “건축적 희소성, 역사적 가치 판단 불충분”이라는 한 문장뿐이었다.
행정은 보존의 ‘최후 보루’인가 ‘첫 관문’인가?
등록문화재 제도는 현행법상 가장 공식적인 보존 절차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과 건물 소유자는 이 절차를 접할 기회조차 없다. 서울시 문화재과 담당자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청이 들어오면 검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선정되는 비율은 낮습니다. 보존 의지가 있는 민간단체나 소유자가 있어야 하고, 행정도 결국 자원 제약이 있으니까요.”
결국 국가와 지방정부의 역할은 후속 지원자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나서야만 움직이는 구조. 이것이 바로 현재 보존 정책의 현실이다.
2. 지방정부의 움직임, ‘도시재생’이라는 양날의 검
군산·목포의 사례 – 적극적 보존과 관광지화의 교차점
군산과 목포는 일제강점기 건축물 밀집 지역으로 유명하다. 정부와 지자체는 ‘근대역사문화공간’이라는 이름으로 해당 지역의 건축물을 일부 문화재로 지정하고, 도로 포장, 안내판, 보수 공사 등을 진행했다.
목포 원도심은 2020년부터 ‘역사문화공간 재생사업’으로 약 500억 원의 예산을 투입받았다.
필자는 2023년 가을, 목포에 방문해 히로쓰 가옥, 구 일본영사관, 구 목포부청사 등을 답사했다. 건축물 외형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지만, 일부 지역은 관광객의 유입을 위해 ‘카페거리’로 바뀌며 원형이 일부 손상된 곳도 있었다.
도시재생과 건축물 보존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가?
지방정부는 건축물 보존을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도시재생은 경제적 활성화가 목표이고, 건축 보존은 역사적 기록 유지가 목표다. 둘은 방향이 같을 수도 있지만, 속도와 우선순위는 다르다.
군산시의 한 지역 공무원은 인터뷰에서 “주민 동의가 없으면 사업 진행이 안 됩니다. 그런데 주민 입장에서는 낡은 집보다는 새 집이 좋잖아요.”라고 말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갈등은, 건축물 보존이 거주자의 실익과 충돌할 때 우선순위가 밀린다는 점이다.
3. 민간은 움직이는데, 정부는 따라오지 않는다?
시민 아카이빙과 건축물 기록 운동
서울 성북구의 '근현대 건축 기록 프로젝트'는 2022년부터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골목의 오래된 건물을 사진으로 찍고, 인터뷰하고, 소책자를 제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화재가 되지 못한 건축물도 기록해야 한다’는 취지다.
필자는 실제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 시민 기록가를 만나보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행정 도움을 받지 않았어요. 대부분 자기 시간 내서 하는 거고, 기초 자료라도 누군가는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민간의 움직임을 정책이 뒷받침하지 못할 때
문제는 이런 시민 운동들이 제도와의 연결고리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정부는 민간의 보존 활동을 ‘좋은 사례’라고 언급하지만, 실제 예산 지원이나 제도적 연결은 거의 없다. 예산은 대부분 문화재 등재 대상이나 행정 주도 사업에만 집중된다.
이러한 현실은, 보존이 ‘개인의 열정’에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를 만든다. 정부는 응원은 하지만, 함께 걷지는 않는다.
4. 법적 한계와 제도 개선이 필요한 시점
보호는 있지만 강제성은 없다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도 소유자의 철거 요청이 있으면, ‘해제’가 가능하다. 국가가 강제로 보호할 수 있는 권한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사유재산권과의 충돌 문제로 복잡한 법적 논의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공익 가치’라는 개념은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다.
필자는 2023년 겨울, 수원시의 한 등록문화재 건물을 촬영하던 중 관계자의 말을 들었다.
“문화재라고 해도 유지·보수는 전부 우리 몫입니다. 그래서 보존보다 파는 게 낫다는 사람이 많아요.”
정부가 지정은 하지만 실질적인 관리와 유지를 민간에 전가하는 구조. 이대로라면 등록문화재 수만 늘고, 실제 보존은 이뤄지지 않는 결과만 반복될 것이다.
제도적 접근: ‘구역 단위’ 보존으로의 전환 필요
현재는 ‘개별 건축물’을 대상으로 한 보존 정책이 주를 이루지만, 보다 근본적인 접근은 ‘구역 단위 보존’이다. 예를 들어, ‘○○동 골목’ 전체를 보존 구역으로 지정하고, 건축물 변경이나 철거 시 제한을 두는 방식이다.
일본, 대만, 유럽 일부 도시에서는 이미 이러한 ‘생활사 기반 건축 보호구역’이 도입되어 있다. 한국도 이제는 ‘한 채’가 아닌, ‘한 동네’를 기록하고 지켜야 할 때다.
근현대 건축물 보존 관련 정부 정책 정리
등록문화재 제도 | 2001년 도입, 총 600여 건 등록 | 등록 기준 복잡, 민간 신청 진입장벽 높음 | 실질적 보호 기능 약함 |
지방정부 도시재생 | 일부 도시서 보존과 연계 추진 | 원형 훼손, 경제 활성화 중심으로 흐름 | 목적 혼재 문제 |
민간 기록 운동 | 시민단체·동네 커뮤니티 주도 활발 | 정부와의 연계·지원 부족 | 공공성 확보 어려움 |
법적 장치 | 보호는 있으나 강제력 없음 | 해제 가능성, 사유재산 우선 | 등록문화재 유지 비용은 민간 부담 |
개선 방향 | 구역 단위 보존 필요 | 제도 전환 필요성 있음 | 입법·지침 정비 시급 |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은 지금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그중 상당수는 아무런 기록도 없이, 역사적 가치를 논의할 틈도 없이 철거된다. 행정은 움직이지만 느리고, 민간은 열정이 있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없다. 이 괴리는 결국 ‘보존’이라는 목표 자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정부는 보존을 말하지만, ‘보는 것’에 머물고 있다. 진짜 보존은 ‘기억하고 남기고 책임지는 것’이어야 한다. 시민의 기록이 행정과 만나고, 지방정부의 재생 정책이 역사적 의미를 중심에 둘 수 있도록 제도가 정비되어야 한다.
건축물은 ‘기억의 그릇’이다. 지금 우리가 그릇을 깨뜨리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미래는 빈손으로 과거를 회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기억의 그릇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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