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이란 단어는 때때로 너무 엄숙하게 들린다. 무언가를 원형 그대로 지키는 것, 손대지 않고 묵묵히 두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건축물 보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특히 근현대 건축물의 경우, 원형 유지와 현재의 활용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보존과 리모델링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는 아직도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의 근현대 건축물이 골목 곳곳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은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아니고, 철거 대상으로 분류된 것도 아닌 ‘애매한 건물’들이다. 그래서 더 많은 건물들이 리모델링이라는 이름 아래 새롭게 변하고 있다. 과연 이 변화는 건축물의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일까, 아니면 기억을 지우는 위장된 개발일까?
이 글은 내가 직접 답사한 5곳의 리모델링된 근현대 건축물 사례를 통해, 실제 보존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균형, 가능성과 한계를 이야기하려 한다. 보존과 활용 사이의 균형은 결국 도시와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1. 서울 종로구 '서촌 ○○한옥 커피숍' – 한옥의 외피를 지킨 채 바뀐 내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공간
서울 서촌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전통 한옥의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는 모던하게 꾸민 카페들이 여럿 눈에 띈다. 그중 하나는 1940년대 중반에 지어진 전통 한옥으로, 현재는 ‘○○커피’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나는 직접 이 카페를 방문했고, 바닥을 밟는 순간 느껴지는 기와 아래의 미묘한 떨림, 낮은 천장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보존인가, 상업화인가?
이 카페의 운영자는 "가능한 한 원형을 유지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관은 거의 변형 없이 남아 있었지만, 내부는 냉난방 시설, 배관, 조명 설치 등 현대적 편의성을 위해 큰 수정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상업적 리모델링은 보존의 의도를 갖고 있다 해도 결국 '상업적 지속 가능성'에 따라 원형 훼손이 불가피한 구조다.
의의: 보존과 활용이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소비 중심 공간으로의 변질 위험 존재.
2. 인천 개항장 '구 ○○양옥 → 디자인 갤러리' – 리노베이션의 정석
근대 양옥을 그대로 살린 디자인
인천 개항장 거리는 1920~30년대에 지어진 양옥 건축물들이 많다. 그중 하나는 일본 무역상이 지은 벽돌 양옥으로, 현재는 지역 예술가들이 운영하는 디자인 갤러리로 탈바꿈했다. 이 건물은 리모델링 과정에서 외벽, 창틀, 마감재를 최대한 보존했으며, 내부는 최소한의 변경만 이루어졌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큐레이터는 이렇게 말했다.
“이 공간의 분위기 자체가 콘텐츠예요. 벽을 깨거나 천장을 뜯어내는 대신, 그 속에 전시를 녹였어요.”
‘재생’을 넘어선 ‘존중’의 리모델링
이 사례는 리모델링이 단지 건물을 활용하는 수단이 아니라, 기억을 이어주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구조를 존중한 채 콘텐츠를 넣는 방식은 가장 이상적인 보존형 리모델링 사례라 할 수 있다.
의의: 원형 훼손 최소화, 공간의 시간성과 문화적 가치 유지.
3. 대구 중구 '○○여관 → 감성 숙박공간' – 기억 위에 만든 새로운 이야기
사라진 여관, 되살아난 풍경
대구 중구의 골목길, 한때 번성했던 ‘○○여관’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스테이’라는 이름의 감성 숙박 공간이 들어섰다. 건물 외관은 유지되었지만, 내부는 전면 리모델링되었다. 과거의 흔적은 객실 이름에 남아 있을 뿐, 창문과 바닥재, 가구는 모두 현대식으로 교체되었다.
운영자는 "과거 여관의 정서를 현대 여행자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 그 공간에서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요소는 많지 않았다.
공간의 정체성이 흐려질 때
이 사례는 보존보다는 활용이 우선된 리모델링이다. 공간은 살아있지만, 시간의 결은 흐려졌다. 상업성과 스토리텔링의 결합은 때로는 기억을 단순한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의의: 활용성은 뛰어나지만, 원형의 의미와 시대적 문맥은 약화됨.
4. 전남 목포 '○○관사 → 공공 북카페' – 공공 리모델링의 좋은 모델
폐가된 공무원 관사, 주민 품으로 돌아오다
목포 원도심에 남아 있던 1930년대 공무원 관사가 한동안 방치되다 2022년 공공 프로젝트로 ‘○○북카페’로 탈바꿈했다. 이 공간은 지자체와 건축 전문가, 시민단체가 함께 기획했으며, 리모델링 전 기록과 설계안 공개를 통해 보존의 공공성을 실현했다.
직접 방문한 날, 내부는 목조 기둥이 그대로 노출된 채 정리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과거의 도면과 관사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이 전시되어 있었다. 책을 읽는 공간이었지만, 그 속에서 ‘공간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다.
공동체가 보존을 주도할 수 있을 때
이 사례는 리모델링이 단지 건물의 외형 변화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와 지역 공동체의 역사를 함께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주민 참여형 설계’는 리모델링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한다.
의의: 공공성과 참여성 중심의 모범적 리모델링 사례.
5. 충북 충주 '○○창고 → 복합문화공간' – 산업 유산의 확장적 재해석
폐창고의 부활
충주의 한 곡물 창고는 1960년대 후반까지 곡물 보관소로 사용되었으나, 수십 년간 방치되다 최근 ‘○○아트팩토리’라는 이름으로 리모델링되었다. 내부는 오픈형 갤러리, 공연장, 공방 공간 등으로 바뀌었고, 외부의 철문과 벽돌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운영자는 말했다.
“이곳의 이야기를 없애는 대신, 새로운 이야기를 쌓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시간성과 창의성의 만남
이 사례는 보존과 활용을 뛰어넘어, 공간의 ‘재해석’을 시도한 경우다. 특히 산업 유산이 예술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지역과 방문객 모두에게 새로운 가치가 제공된다.
의의: 산업 유산의 보존 + 문화적 재해석의 성공적 결합.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리모델링 5선 비교 요약
1 | 서울 서촌 | 한옥 → 카페 | 상업적 리모델링 | 외관 유지, 내부 수정 | 활용성 높지만 정체성 약화 우려 |
2 | 인천 개항장 | 양옥 → 갤러리 | 문화예술 재생 | 외형 및 내부 보존 | 이상적 보존형 리모델링 |
3 | 대구 중구 | 여관 → 숙소 | 감성 마케팅형 | 구조 변화 큼 | 활용 중심, 기억의 재구성 |
4 | 목포 원도심 | 관사 → 북카페 | 공공 프로젝트 | 원형 유지 + 커뮤니티 참여 | 지역 중심 보존 모델 |
5 | 충주 시내 | 창고 → 복합공간 | 산업 유산 재해석 | 외형 유지, 내부 창조적 변화 | 보존+확장형 리모델링 |
근현대 건축물의 보존과 리모델링은 결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건물의 물리적 상태, 위치, 활용 가능성, 소유 구조, 예산 등 수많은 요소가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조건적인 보존’이 아니라, 기억을 지키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 글에서 소개한 다섯 곳의 사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존과 활용’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공간은 상업성과 기억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고, 어떤 공간은 과거를 되살리는 데 성공했으며, 또 어떤 공간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며 미래로 나아가고 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간에 대한 태도다. 그 건물이 가진 시간의 무게를 이해하려는 자세, 리모델링을 ‘개발’이 아닌 ‘연결’로 보는 시선. 이것이 보존의 시작이고, 도시가 진짜로 지속가능해지는 방법이다.
앞으로 더 많은 리모델링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남기고 싶은 기억과 지워선 안 될 시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또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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