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낡은 건물이 허물어지고, 새 건물이 들어선다. 우리는 이것을 ‘발전’이라 부르고, 도시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단순히 건물 한 채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인식하고 있을까?
서울 강북구의 골목을 걷다 우연히 만난 한 붉은 벽돌 주택. 외벽은 이끼로 덮여 있었고, 창틀은 부서질 듯 낡아 있었지만, 그 건물 앞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서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공간이 주는 분위기, 질감, 시간의 흔적이 내 기억을 붙들었다.
이 글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근현대 건축물을 왜 잊고 있었을까?” 일제강점기부터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쌓여온 이 건축물들은 단지 낡고 오래된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품은 생활의 기록이다.
이제는 근현대 건축물의 ‘남은 수명’을 이야기하는 대신, 그들이 지닌 진짜 가치의 정체를 다시 마주볼 시점이다. 우리가 지금 어떤 시선으로 이 건축물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미래 도시의 기억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1. ‘낡음’과 ‘쓸모없음’의 오해 – 가치의 착시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철거 대상이 되는 현실
내가 처음 마주한 건 서울 강서구의 한 옛 양옥집이었다. 1965년 완공된 이 2층 주택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간결한 선과 낮은 창이 특징이었다. 한 눈에도 무척 낡아 보였다. 실제로 관리가 되지 않아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이웃 주민들도 “언제 헐릴지 몰라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집의 내부에 들어가 보니, 시간의 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손잡이가 달린 유리문, 나무로 짠 바닥, 구식 형광등. 누구도 눈길 주지 않던 공간이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도시의 기억'을 보았다.
사용 가치만으로 평가되는 건축의 한계
지금까지 많은 근현대 건축물들은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에너지 비효율, 구조 불안정, 활용성 부족 등의 이유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기준은 건축을 ‘기능’으로만 보는 협소한 시각이다. 건축은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람, 문화, 역사, 기억이 얽힌 총체적 존재다.
2. 건축물에 깃든 시대정신 – 텍스트로서의 공간
일제강점기 건축 – 지배의 흔적을 기억하는 공간
인천 화수동의 한 일본식 목조가옥. 1920년대에 지어진 이 집은 일본 상인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폐가 상태로 방치되어 있지만, 내부에는 다다미 방과 목재 복도가 남아 있고, 지붕에는 전통 일본식 기와가 그대로 있다.
이 건축물은 불편한 과거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억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지배와 억압의 흔적을 무작정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1960~1980년대 건축 – 산업화의 생활 기록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1970년대 연립주택. 이곳은 도시 외곽의 집단 거주형태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건축물이다. 나는 실제로 이곳에 거주 중인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에는 여름이면 옥상에 다 올라가 빨래 널고, 윗집에서 수박 나눠먹고 그랬어요.”
이런 건물은 건축적으로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세대의 일상과 공동체 기억을 담은 생활의 용기다.
3.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 우리는 어떤 도시를 원하는가?
가치의 전환: 개발 중심에서 기억 중심으로
우리가 지금껏 해온 도시계획은 ‘신축 = 발전’이라는 등식을 중심에 두었다. 도시가 낡으면 새로 짓고, 골목이 지저분하면 정비하고, 오래된 건물은 부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 공식이 만들어낸 도시는 기억의 단절, 정체성의 소멸, 그리고 공통된 풍경의 반복이었다.
근현대 건축물 보존은 단지 ‘과거를 지키는 일’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작업이다. ‘새로움’만을 추구한 도시는 결국 아무 이야기도 담지 못한 채 공허하게 남게 된다.
체험형 스토리: 전주 서학동에서 만난 골목의 기억
전북 전주시 서학동에는 근현대 건축물이 다수 보존된 골목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사장님을 만났다. 1960년대 건물을 개조한 이 책방은 마당과 다락방을 그대로 살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골목이 가진 시간의 깊이가 사람을 불러요. 개발로는 만들 수 없는 감성이에요.”
이 말이 전부였다. 시간이 축적된 공간의 가치는, 개발로 결코 대체될 수 없다.
4. 제도 밖의 공간들 – 정부와 사회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문화재가 아닌 건축물의 운명
문화재청에 등록된 ‘등록문화재’는 약 600여 건. 그러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근현대 건축물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보호받지 못한 채 철거 위기에 놓여 있다. 내가 기록했던 수원의 한 사진관 건물도, 문화재 등록 조건에 미치지 못해 결국 철거됐다.
등록 기준은 ‘건축적 희소성’, ‘역사적 가치’ 등을 요구하지만, 이는 너무 협소하다. 주민의 기억, 공동체적 의미, 생활사적 가치는 여전히 평가 기준에서 제외되고 있다.
제도만으론 보존이 불가능한 이유
또한, 현재 제도는 보존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더라도 강제력이 없다. 건물 소유자의 의사가 절대적으로 작용하며, 사유재산권 침해 논란은 보존 정책의 가장 큰 벽이 된다. 필자가 만난 서울 마포구의 한 근대주택 소유자는 이렇게 말했다.
“문화재 지정된다고 해도 보수는 다 제가 하라는 거잖아요. 그럼 왜 보존해야 하나요?”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정부의 보존 의지와 시민의 부담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이를 메울 수 있는 현실적 정책이 시급하다.
5. 기억을 남기는 다양한 방식 – 보존은 물리적 형태만이 아니다
기록과 아카이빙 –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억의 보존
내가 참여했던 ‘서울 근현대 건축 기록 프로젝트’에서는 매달 시민들과 함께 오래된 건축물을 촬영하고, 거주자와 인터뷰하며, 마을 아카이브를 만드는 활동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은, 보존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장의 사진, 한 줄의 기록, 골목에서 들은 한 사람의 말. 이 모두가 건축물의 ‘사회적 가치를 설명하는 자료’가 된다.
스토리텔링을 통한 공간 활용
전북 군산의 ‘히로쓰 가옥’은 일본식 주택이지만, 현재는 그 건물의 역사와 구조를 중심으로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단지 건물을 보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서사와 의미를 함께 전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건축물이 가진 가치의 콘텐츠화 모델로도 활용 가능하다.
근현대 건축물의 가치 요약
가치 오해 | 낡고 쓸모없다는 인식 | 공간을 기능으로만 평가한 결과 |
시대정신 반영 | 일제강점기~산업화 시기의 삶과 구조 | 역사적 맥락과 생활사 반영 |
개발과 보존 | 도시개발 중심 사고의 문제 | 도시 정체성과 기억의 단절 유발 |
제도적 한계 | 등록문화재 외 보호 장치 부족 | 사유재산권과 행정 사이의 괴리 |
새로운 시도 | 시민 기록, 공간 콘텐츠화 | 다양한 방식으로 가치 확장 가능 |
근현대 건축물은 단지 오래된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정신, 한 사회의 기억, 한 세대의 삶이 응축된 기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종이 위에 쓰인 문서보다 훨씬 생생하고, 그 자체로 공간을 통해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이제 근현대 건축물을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 대신, 이 건축물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남기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보존이 어려울 수도 있다. 기능적으로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공유하는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도시는 하루하루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 속에 남은 흔적들 역시 도시의 일부다. 근현대 건축물의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아니라, 미래의 도시가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 우리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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