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물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답사, 전라도 편

헤이 봄 2025. 8. 4. 01:00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건축물은 그 자체로 시간이다. 콘크리트나 벽돌, 기와와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외형은 단지 형태가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 시대의 공기와 사람들의 숨결을 담고 있다. 특히 근현대 건축물은 일제강점기, 해방 후 혼란기,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우리 사회가 겪은 급격한 변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라도는 대한민국 남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조선시대 전통 유산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근현대 건축물의 밀도와 다양성 또한 놀라울 만큼 풍부한 지역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이주가 많았던 군산, 항구와 산업의 중심이었던 목포, 교통과 행정 중심지였던 나주와 광주 등은 역사의 변곡점마다 건축물을 통해 시대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번 답사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군산, 목포, 광주, 나주, 순천 다섯 곳을 직접 발로 답사했고, 그곳에서 만난 건축물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기록했다. 단순한 건축 견학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의 대화를 듣는 여정이었다. 전라도 근현대 건축물 답사는 곧 한국의 20세기를 걷는 일이었다.


1. 군산 – 근대도시의 흔적을 가장 뚜렷하게 간직한 곳

히로쓰 가옥 – 지배층의 일상은 어떻게 남았을까?

군산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이주민들이 많이 정착했던 도시다. 그중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이 ‘히로쓰 가옥’이다. 1930년대 일본인 지주 히로쓰가 지은 이 목조 가옥은 일본식 정원과 다다미방, 장지문 구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나는 이곳을 찾은 날, 비가 내리고 있었고, 습기 머금은 목재의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습도조차 시대의 감각처럼 느껴졌다. 해설사는 말한다.

“이 가옥은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식민지 지배 계층의 특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공간은 ‘기념’이 아니라 ‘기억’을 위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보존의 목적은 미화가 아니라 기록이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 위압적인 금융의 상징

히로쓰 가옥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압도적인 외형을 자랑한다. 내부는 당시 은행으로 사용되던 구조를 그대로 살려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높은 천장, 무거운 철문, 화려한 석조 장식은 금융권력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시각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건축물은 근대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국주의적 디자인 감각의 전형이기도 하다.


2. 목포 – 항구도시, 건축물에 쌓인 제국과 상인의 기억

구 목포 일본영사관 – 정치와 외교의 흔적

목포 유달산 기슭에 위치한 이 건물은 1900년대 초반 일본이 목포를 통제하기 위해 지은 일본영사관이다. 현재는 근대역사관으로 운영 중이며, 외관과 내부 모두 잘 보존되어 있다. 나는 전시보다도 그 건물의 두꺼운 기둥과 벽이 더 인상 깊었다.

단단하게 구축된 외벽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건축된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의 기능이 단순히 공간을 넘는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 수탈의 시스템이 머문 곳

이 건물은 이름만 들어도 역사적으로 무게감이 다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조직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만든 회사로, 이 지점은 그 지역 거점이었다.

방문 당시 마침 리모델링을 준비 중이었고, 담당 학예사는 내게 말했다.

“이 건물의 외벽은 단단하지만, 그 안의 기억은 무겁습니다.”

보존은 구조가 아니라 기억을 다루는 작업이라는 걸 절감한 순간이었다.


3. 광주 – 민주화의 뿌리와 산업화의 흔적이 공존하는 도시

구 전남도청 본관 – 공간과 민주주의의 기억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된 이 건물은, 단순히 관공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서 상징적 공간이다. 현재는 리모델링 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그 역사성으로 인해 광주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복원 방향이 논의되고 있다.

나는 복원 중인 건물 외벽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경찰병력의 주둔, 계엄군의 점령, 시민들의 점거… 이 모든 사건이 이 건물 안팎에서 벌어졌다는 걸 떠올리니, 건축물이 곧 역사현장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광주 구 산업은행 – 산업화 시대 자본 흐름의 흔적

이곳은 1970년대 산업화를 상징하는 금융 건물이다. 전형적인 콘크리트 건축물로, 미감보다는 기능에 집중된 형태다. 하지만 내부의 벽지, 조명, 창문 크기 등에서 그 시기의 경제관과 사회 구조를 엿볼 수 있었다.


4. 나주 – 전통과 근대가 겹쳐진 전라도의 중심지

구 나주목 관아와 근대 건축의 공존

나주 구도심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물과 20세기 초 건축물이 나란히 공존하는 보기 드문 곳이다. 특히 근대교육기관이었던 구 나주사범학교 건물은 벽돌 구조와 전통식 창호가 혼재된 이행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방문 당시 한 마을 해설사가 말하길,

“전통도 근대도, 결국 이 도시의 역사입니다. 둘 다 있어야 나주답죠.”

이 말이 곧 보존의 균형감각이란 생각이 들었다.


5. 순천 – 자연과 도시가 만나는 속에 남은 건축의 유산

구 순천역 관사촌 – 철도와 함께한 도시의 성장기

순천에는 일제강점기 철도 관사촌이 남아 있다. 1930년대 철도청 직원들이 거주하던 목조건물이 지금도 일부 원형을 유지한 채 존재한다. 나는 이 관사촌을 걸으며 마치 시간의 틈 속을 걷는 기분을 느꼈다.

건물 외벽에는 그 시절 페인트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기와 밑으로 자란 잡초조차 아름답게 보였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온기가 아직도 담겨 있는 듯했다.


한국 전라도의 근현대 건축물 답사 요약

군산 히로쓰 가옥 1930년대 일본식 목조 주택 문화재·관람지 식민지 지배계층 주거
군산 구 조선은행 1920년대 석조건물, 금융기관 전시관 제국 금융권력 상징
목포 일본영사관 1900년대 석조 2층 건물 역사관 일제 정치기관
목포 동양척식회사 1910년대 고딕 양식 석조 리모델링 중 수탈 시스템 상징
광주 구 전남도청 1930~40년대 관공서, 민주화 장소 복원 중 5·18의 상징적 공간
나주 구 사범학교 1930년대 이행기 건축 공공 전시 공간 근대 교육의 흔적
순천 철도 관사촌 1930년대 목조 주택 군 일부 거주·폐가 철도 행정기억
 

전라도의 근현대 건축물을 따라 걷는 여정은 단지 낡은 건물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겪어온 20세기의 단면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밟고, 몸으로 느끼는 과정이었다.

히로쓰 가옥의 정원에서는 침묵 속의 권력을, 광주의 도청에서는 시민의 외침을, 목포의 영사관에서는 제국주의의 그림자를, 나주의 학교에서는 교육의 숨결을, 순천의 관사촌에서는 철도와 도시의 숨 가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건축물들은 모두 더 이상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품은 물리적 기억의 매개체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와 소통할 수 있는 드문 창이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도시에서 이 소중한 시간의 흔적들을 다시 발견하고,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답사하는 순간마다, 과거는 다시 현재가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이 모여, 더 깊은 미래의 도시를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