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 철거 대상입니다. 낡고 쓸모가 없어요."
한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역사적 장소, 누구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사라지는 장면을 우리는 너무도 익숙하게 마주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근현대 건축물’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했던 수많은 공간들이 개발이라는 논리에 밀려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다.
반면, 일본의 도심 한복판에서는 1930년대 상점이 현대 미술관으로 재탄생하고, 오래된 여관이 북카페로, 옛 관청이 지역 커뮤니티 센터로 쓰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같은 동아시아, 유사한 역사적 맥락을 공유하면서도 근현대 건축물을 대하는 태도와 전략은 분명하게 다르다.
이 글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근현대 건축물 보존 사례를 중심으로 양국이 취하는 보존 접근 방식, 정책적 차이, 지역사회와의 연계 방식 등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직접 방문한 장소들에서 느낀 체험과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보존이 단지 과거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 자산으로 연결되는지에 주목할 것이다.
이 비교를 통해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보존을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1.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보존 현황
군산 히로쓰 가옥 – 기억은 있지만 맥락이 없다
전라북도 군산에 위치한 ‘히로쓰 가옥’은 일본식 목조 주택으로, 1930년대 일본인 지주가 거주하던 공간이다. 현재는 문화재로 등록되어 내부를 개방하고 있지만, 해설이나 안내판은 단편적이고, 지역의 전체 맥락과 연결된 정보는 부족하다.
2024년 11월, 나는 이곳을 찾았다. 관리인은 짧게 안내하고는 문을 닫았다. 내부는 정돈되어 있었지만, 왜 이 건물이 보존되었는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일본식 집이잖아요. 관리만 하고 있어요.”
단지 ‘형태의 보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건축물의 기억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콘텐츠가 부재한 상태였다.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 보존은 성공했지만, 접근은 단선적
서울 서대문형무소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근현대 건축물 보존 사례다. 건물의 원형이 유지되어 있으며, 내부 전시도 꽤 충실하다. 그러나 방문자 동선은 거의 전시 위주로 짜여 있고, ‘체험’과 ‘참여’를 통한 기억 재생산의 구조는 부족하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비슷한 수감 시설이 ‘역사 현장 체험관’으로 바뀌어, 당대의 일상, 감정, 정치 사회 분위기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한국은 여전히 ‘정보 중심’ 전시에 머무르고 있는 셈이다.
2. 일본의 보존 사례 – 기억과 활용을 동시에
도쿄 쿠라야시키(蔵屋敷) – 근대 상점의 리노베이션 성공 사례
도쿄 외곽 마치다시에 위치한 ‘구 ○○상점’은 1920년대에 지어진 상점 건물이다. 나는 이곳을 2023년 9월 방문했다. 현재 이 건물은 카페와 갤러리, 마을 정보센터로 사용되며, 내부에는 그 시절 물품, 광고지, 생활 도구가 자연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운영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건물은 형태보다 이야기가 중요해요. 사람들의 기억이 이 안에서 살아있죠.”
보존과 활용,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리모델링의 모범 사례였다. 건물의 역사와 기능이 시민들의 일상과 연결되며, 생활 속 기억의 장소로 재탄생한 것이다.
교토 마치야 거리 – 집단적 보존과 지역 경제 활성화
교토의 ‘마치야(町家)’ 거리에는 1930년대에 지어진 연립 상가주택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 놀라운 점은, 이 거리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 지자체, 민간기업이 협약을 맺고 집단 보존과 운영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옥 일부는 게스트하우스로, 일부는 전통 상품 판매점으로, 또 다른 곳은 미니 박물관이나 체험 공방으로 활용된다. 나는 게스트하우스 운영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서 자고, 산책하고, 식사하는 것 자체가 역사 속을 걷는 일이에요.”
보존이 단지 건축물의 형태 유지가 아니라, ‘경험 경제’의 핵심 요소로 기능하고 있었다.
3. 정책과 제도 비교 – 구조적 차이가 만드는 결과
한국 – 보존은 ‘국가 주도’ 중심, 민간 참여는 제한적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보존은 주로 문화재청과 지자체의 결정에 의존한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있지만, 등록되기까지 절차가 까다롭고, 사유지의 경우 소유자의 동의가 절대적이다. 민간이 참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대부분은 보존 이후 운영이 미흡해 방치되거나 전시 위주로만 활용된다.
또한, 보존 이후 공간 활용에 대한 계획이 구체적으로 부족해 재정 지원은 초기만 존재하고, 장기 운영 모델은 부재한 경우가 많다.
일본 – 민간 중심 보존 지원 체계와 지역 재생 연계
반면 일본은 국가보다는 민간과 지역사회의 자율성과 주도성이 보존의 핵심 축이다. 대표적인 것이 ‘마치야 재생 프로젝트’, ‘문화재 민간위탁 프로그램’ 등으로,
- 지방 정부는 세제 혜택과 보존비 일부 지원
- 민간은 보존과 활용 모델을 직접 설계 및 운영
- 시민은 공간을 일상 속에서 체험하고 활용
이런 3단계 구조가 구축되어 있다.
특히 지역경제활성화와 보존 정책이 유기적으로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보존은 ‘투자 대비 효율이 낮은 행정’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도시 전략’으로 인식된다.
4. 보존을 넘어선 기억의 재구성 – 스토리텔링의 힘
공간이 기억을 전할 때 – 서사 없는 보존은 금세 잊힌다
나는 군산과 도쿄를 각각 방문한 후, 근현대 건축물의 보존은 ‘형태’보다 ‘이야기’가 핵심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건물이라도,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기억, 시대의 맥락, 사회적 상징이 담겨야 진짜 의미를 지닌다.
한국의 경우,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은 점점 정교해지고 있지만,
‘왜 보존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부족하다.
콘텐츠와 연계된 보존은 ‘살아 있는 기억’이 된다
일본의 보존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점은, 건축물 하나하나가 마치 책 한 권처럼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 단위의 건축물 보존은 미술, 문학, 공연, 로컬푸드, 여행 콘텐츠와 결합되며, 단순한 공간이 아닌 '경험의 장'으로 확장된다.
그 결과, 방문자는 단지 ‘보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배우기 위해’, ‘느끼기 위해’ 찾는다.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장기적인 보존이 가능한 구조다.
근현대 건축물 보존은 단지 건축 양식을 지키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과거를 기억할지, 또 어떤 방식으로 현재와 미래를 잇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선택이자 문화적 전략이다.
한국과 일본은 유사한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지만, 보존에 접근하는 방식은 매우 다르다. 한국은 형태 중심의 보존, 일본은 활용 중심의 보존을 선택했다. 그 결과, 한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지비 부담과 기능적 한계로 방치되는 공간이 많지만, 일본은 그 건축물이 생활과 연결된 기억의 장소로 살아남는다.
이제 한국도 보존을 단지 ‘개발을 막는 일’이 아닌, 새로운 도시 콘텐츠와 정체성을 설계하는 기회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 보존 이후의 활용 계획
- 주민 참여형 스토리텔링
- 민간 협력 모델 구축
이 세 가지가 뒷받침될 때, 근현대 건축물은 살아 있는 문화자산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형태는 쉽게 사라진다. 그러나 기억은, 의미는, 이야기는
적절히 보존하고 나누는 이가 있다면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한국의 건축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과 도시재생의 연결고리 (0) | 2025.08.04 |
---|---|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답사, 전라도 편 (2) | 2025.08.04 |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과 지역사회: 보존인가 개발인가 (3) | 2025.08.03 |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다 (1) | 2025.08.03 |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리모델링 사례로 본 보존과 활용의 갈림길 (1) | 2025.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