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건물은 단지 과거의 흔적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건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쓰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특히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들은 격동의 20세기를 지나오며
단순한 구조물을 넘어선 시대의 정체성과 공간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중 상당수는 '낡았다'는 이유로 철거되거나
주차장, 창고, 방치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길을 걷는 건축물들도 있다.
책방, 전시장, 공유공간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시민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건축물들이다.
이 글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근현대 건축물이
어떻게 현대적 기능을 수용하며 활용되고 있는지를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책방, 전시장, 공유공간으로 전환된 건축물들의 변신 과정과 가치를 탐구하며
보존과 활용의 균형 속에서 우리가 어떤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이는 단지 공간의 재활용이 아닌,
과거와 현재, 사람과 지역이 연결되는 도시문화적 재생의 이야기이다.
1. 책방으로 다시 태어난 건축물들
1-1. 전주의 '책방 심다' – 근대 한옥의 새로운 용도
전북 전주시 완산구의 구도심 한복판에는
1930년대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을 리모델링한 독립서점 ‘책방 심다’가 있다.
이곳은 원래 고물상을 운영하던 노부부의 집이었다.
구옥의 낡은 마루와 오래된 기와는
기존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며 내부만 가볍게 리모델링하였다.
책방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책은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고, 이 집도 그렇죠.
그래서 둘은 잘 어울려요.”
이곳에선 문학, 지역문화, 건축에 관한 책들을 주로 취급하며,
한 달에 한 번 건축 유산 답사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한다.
내가 직접 찾았을 때, 낮은 처마 밑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서가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정적이 참 인상 깊었다.
1-2. 군산의 '이룸서점' – 적산가옥 속 지역서점
군산 월명동에 위치한 ‘이룸서점’은
일제강점기 지어진 일본식 목조 주택을 개조한 책방이다.
좁은 복도와 미닫이문, 낮은 천장,
그리고 목재의 특유한 온기가 그대로 유지된 공간이다.
책방 한편에는 지역 시민들이 기증한 자료가 모여 있으며,
군산의 근대사를 주제로 한 소형 전시도 함께 운영된다.
“책이 있는 공간은 늘 이야기를 필요로 하죠.
이 집엔 원래 이야기들이 살고 있었어요.”
그 말처럼, 책방은 건축물의 역사성과 출판문화가 만나는
작은 복합문화 플랫폼이 되고 있다.
2. 전시장으로 확장된 과거의 공간들
2-1. 서울 문래의 '스페이스 모래' – 공장 → 전시장
서울 영등포 문래동은 원래 철공소가 밀집한 공업 지역이었다.
그 중심부에 위치한 ‘스페이스 모래’는
1960년대 철공소 건물을 리모델링한 대안 전시 공간이다.
외벽은 그대로 녹슨 철재 구조를 유지하고 있고,
내부는 철제 기둥과 콘크리트 바닥을 그대로 노출한 채
사진전, 설치미술, 워크숍 등 다양한 예술 행사가 열리고 있다.
“무언가를 만들던 공간에서
지금은 무언가를 표현하는 공간이 됐습니다.”
공장의 ‘기계성’과 예술의 ‘감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창작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2-2. 대구 계산동의 '계산예술제 전시장' – 선교사관사 활용
대구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선교사 사택은
1900년대 초반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다.
최근 이곳은 지역 예술단체 주관으로
매년 봄 ‘계산예술제’ 기간 중 임시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1층은 사진전
- 2층은 지역 청년작가의 설치미술
- 마당은 공연장 겸 토크무대로 활용됨
건축물의 특성상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기에 좁고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오히려 관객에게 새로운 몰입감을 선사한다.
“기억이 있는 공간에 예술을 얹으면,
그 공간도 예술이 되죠.”
3. 공유공간으로 재탄생한 건축물들
3-1. 인천 배다리의 '마을공장' – 인쇄소 → 커뮤니티 공간
배다리 골목에는 1940년대에 세워진
한 인쇄소 건물이 ‘마을공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열렸다.
이곳은 지금
- 지역 청년 창작자들의 코워킹 스페이스
- 주민 대상 강연과 워크숍
- 마을 공동회의 장소
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
이곳에서는 ‘근현대 건축물 이야기 나눔회’라는 프로그램이 열리고 있었고,
할머니 한 분이 인쇄소에서 일하던 1960년대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사람들이 모이니까,
건물도 다시 살아난 거 같아요.”
3-2. 부산 초량동의 '1894 공유공간' – 한약방 → 로컬 허브
부산 동구 초량동, 구 한약방 건물이
‘1894 공유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지역 활성화 공간이 되었다.
한약재를 진열하던 선반은 책장으로,
처방전 작성대는 카운터로,
내부 복도는 지역 청년의 사진 전시 공간으로 바뀌었다.
주민 누구나 자유롭게 공간을 예약하고 쓸 수 있는 이곳은
근대 상업공간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공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갖춘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과거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건물은 여전히 동네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어요.”
4. 보존 그 이상의 가치 – 지역과 사람을 잇는 공간
4-1. 건축물 + 이야기 + 사람 = 지속 가능한 활용
앞서 살펴본 사례들은 공통적으로
단순한 구조물의 재활용을 넘어,
이야기와 공동체가 연결되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 책방에서는 기억이 공유되고
- 전시장에서는 예술이 공명하며
- 공유공간에서는 지역이 재결합된다
단순히 ‘남긴다’는 보존을 넘어서
‘살린다’는 활용의 개념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확장된 보존이라고 볼 수 있다.
4-2.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기능, 같은 장소
시대가 바뀌면 공간의 기능도 달라진다.
하지만 장소가 가지는 상징성과 정체성은 유지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 무조건적인 원형 보존이 아닌
- 가치 중심의 재해석
즉, 시대에 맞는 쓰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근현대 건축물 보존과 활용이
미래의 도시문화 자산으로 거듭나는 데 꼭 필요한 관점이다.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활용 사례 요약
책방 | 전주 '책방 심다' | 한옥 주택 | 독립서점 | 마루·기와 보존, 답사 프로그램 |
책방 | 군산 '이룸서점' | 적산가옥 | 지역서점+전시 | 일본식 목조 건축 유지 |
전시장 | 서울 '스페이스 모래' | 철공소 | 예술전시공간 | 산업유산 활용, 개방형 구조 |
전시장 | 대구 계산동 | 선교사관사 | 예술제 임시 전시장 | 붉은벽돌 보존, 전시 혼합형 |
공유공간 | 인천 '마을공장' | 인쇄소 | 커뮤니티 공유공간 | 지역활동 플랫폼 |
공유공간 | 부산 '1894 공유공간' | 한약방 | 로컬허브, 코워킹 | 상업공간 구조 재해석 |
근현대 건축물은 더 이상 ‘보존이냐 철거냐’의 이분법 속에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이 건물들이 새로운 쓰임을 통해 현대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책방, 전시장, 공유공간은 그저 건물의 용도를 바꾼 것이 아니다.
그 공간 안에 깃들어 있던 시간, 사람, 기억들을
지금 우리의 언어와 방식으로 다시 불러오는 작업이다.
이런 사례들은 ‘남기는 건축’에서 ‘살아나는 건축’으로
근현대 건축물 활용의 관점을 전환시킨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간과 사람의 관계다.
사람이 머무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시간을 만들 수 있다면
그 공간은 이미 과거를 넘어선 지속 가능한 문화 자산이다.
이제 우리는 근현대 건축물을 바라볼 때,
그 안에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를 넘어서,
그 안에서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을지를 함께 상상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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