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늘 걸어 다니는 도시의 골목마다,
그 어디쯤엔 ‘낡은’ 건물이 한 채쯤은 남아 있다.
그 건물은 오래됐고, 기능도 떨어지며,
때로는 도시의 재개발 논리에 의해 ‘비효율적인 구조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 건물은 어쩌면
일제강점기의 산업 변화, 해방 직후 도시 확장,
1960~70년대 지역 경제 성장의 실질적 흔적일 수 있다.
이러한 근현대 건축물은 단순한 낡은 건축물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 문화가 집약된 살아 있는 역사적 자산이다.
문제는 이런 건축물들이
제대로 된 보호 장치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법은 존재하지만, 현실과의 간극은 크고,
보존을 위한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미비하다.
이 글에서는 근현대 건축물 보존을 위한 국내 법적 제도가
어떻게 마련되어 있으며,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직접 답사하며 마주한
제도와 현장의 온도 차를 체험적 시선으로 기록하며,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함께 고민해본다.
1. 근현대 건축물 보존 관련 법령 개요
1-1. 문화재보호법의 한계와 적용 조건
한국에서 역사적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법은
바로 「문화재보호법」이다.
이 법은 국가지정문화재, 시도지정문화재, 등록문화재 등으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복구하며, 훼손을 방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이 법이 규정하고 있는
‘문화재’의 개념은 지정된 대상에만 한정되며,
특히 근현대 건축물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제외되기 쉽다:
- 건축 연대가 100년 미만
- 전통적 형식이 아닌 서양식 구조
- 활용성이 낮다고 평가됨
즉, 시대가 충분히 지나지 않았고,
형태가 전통적이지 않으며,
이미 리모델링된 흔적이 있을 경우 등록이 어렵다.
1-2. 등록문화재 제도: 유연성은 있으나 절차는 복잡
2001년부터 시행된 등록문화재 제도는
전통문화재로 보기엔 이르지만,
보존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나 시설 등을
'등록문화재'로 등재해 보호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이 제도는 특히 근현대 건축물 보호에 있어
가장 현실적인 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실제 등록 건수는
2024년 기준 약 1,000건 남짓에 불과하며,
민간 소유 건물은 신청 과정, 보존 조건, 관리 비용 문제로
등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2. 제도의 실행 현황과 문제점
2-1. 법은 존재하지만 '강제력'은 부족
내가 2023년 봄, 전북 익산의 옛 철도사무소 건물을 방문했을 때다.
이 건물은 해방 전 일본인들이 철도사업을 운영하던 공간으로,
지금은 상가 뒤편에 무단 점유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지자체에 문의해보니,
등록문화재로 신청은 가능하지만,
민간 소유자가 원치 않으면 법적 제재는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즉, 등록제도는 소유자의 '자발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셈이다.
또한, 등록 후에도 보존·관리 비용의 상당 부분이
소유자에게 전가되므로,
유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소규모 개인들은
등록 자체를 기피하게 된다.
2-2. 개발 논리와 충돌하는 현실
근현대 건축물의 상당수는
도심 내 노른자위에 위치해 있다.
즉, 개발사업자들에게는
재개발 대상으로 눈에 띄는 대상이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공사 현장에서는
1930년대 지어진 일본식 목조 주택 두 채가
사전 조사 없이 철거되었다.
나는 그 현장을 직접 찾았지만,
이미 골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현행법상,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건축물에 대해선
사전 신고 의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기억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구조다.
3. 제도 개선과 해외 사례 비교
3-1. 일본의 ‘문화재적 건축물’과 도시 맥락 보호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근현대 건축물 보호에 관심을 가졌다.
1975년부터 시행된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 제도를 통해,
개별 건축물뿐만 아니라
도시·마을 단위로 건축 유산을 통합 관리하고 있다.
예:
- 교토의 기온 거리
- 나가사키의 데지마 지구
- 도쿄의 구요코하마건물지구
또한, 일본은 '민간 자산 보호 보조금'을 통해
문화적 가치가 있는 민간 건축물의 보수 비용의 80~90%를 지원한다.
즉, 소유자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제도를 벤치마킹해
등록문화재 또는 그 외 보호 대상에 대한
보존 컨설팅 + 재정적 보조 + 리모델링 지원이 병행되어야 한다.
3-2. 유럽의 Heritage Impact Assessment 제도
유럽 국가들은
문화유산의 훼손 가능성이 있는 개발 사업에 대해
사전 영향 평가(Heritage Impact Assessment)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환경영향평가와 유사하지만,
건축문화적 가치에 대한 분석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컨대, 런던 도심의 개발계획에선
- 주변 건축물의 역사성,
- 해당 개발이 가져올 조망권 변화,
- 건축물 자체에 미치는 영향 등을
정밀하게 검토한 후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한국에서도 도시 재생사업, 공공주택 개발, 철거 전 단계에서
이러한 제도를 도입한다면
소중한 건축물이 사라지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4. 현장의 목소리 – 두 명의 인터뷰
4-1. 건축사 A씨의 이야기: “보존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서울 종로에서 오래된 교회를 리모델링 중이던 건축사 A씨는 이렇게 말했다.
“건축적으로 아름다운 건물은 많지만,
그걸 살리기 위해선 돈과 설득과 시간을 모두 써야 해요.”
그는 문화재로 등록된 건물이 오히려 규제만 많고,
실질적 지원은 거의 없다는 현실을 지적했다.
“보존 설계는 예산이 더 들고,
시공사도 귀찮아하죠. 그래서 개발업자들은 그냥 부수려 합니다.”
4-2. 주민 B씨의 이야기: “우리 동네도 좀 지켜줬으면…”
전북 전주의 한 골목에서 적산가옥을 지키고 있는 B씨는
외부 도움 없이 직접 수리를 계속하고 있다.
“관광객은 오는데, 정작 이 집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우리 몫이에요.
여기는 문화재도 아니고, 보호 대상도 아니에요.”
그는 소유자 중심의 정책이 아닌,
공동체와 도시 중심의 보호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근현대 건축물 보존 제도와 현실 요약
구분 | 내용 | 문제점 | 대안 및 개선 방안 |
문화재보호법 | 전통유산 보호 중심 | 근현대 건축은 포함 어려움 | 적용 대상을 유연하게 확장 |
등록문화재 제도 | 자발 등록 가능 | 강제력 없음, 유지비 과중 | 보조금·전문가 컨설팅 지원 |
개발 규제 | 사실상 미비 | 사전철거 통제 불가 | 사전 영향평가 의무화 도입 |
해외사례(일본) | 전통지구 단위 관리 | - | 개별+지역 단위 보호 확대 |
해외사례(유럽) | 문화유산 영향평가 | - | 건축문화 중심의 도시계획 필요 |
근현대 건축물 보존은 단순한 ‘노후 건축물 유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세대를 잇는 기억의 매개체를 지켜내는 일이다.
법은 분명 존재하지만,
실제로 보호받고 있는 근현대 건축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 강제력 없는 등록 시스템,
- 과도한 소유자 부담,
- 제도적 사전 대응의 부재 때문이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보존이 곧 규제가 아니라, 기회가 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건축물이 아니라
그 공간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 건축을 사랑하는 지역사회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법이 없어서 지키지 못했다’는 말을 하기보다,
‘이런 제도를 만들었기에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지금 이 순간,
우리 눈앞에 있는 작은 건축물 하나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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