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물

근현대 건축물 중심의 지역 문화재 지정 과정

헤이 봄 2025. 8. 12. 03:00

도시는 시간과 함께 겹겹이 쌓인다.
하나의 골목, 하나의 건물에도 수십 년, 혹은 한 세기 가까운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근현대 건축물은 그 이야기의 중요한 한 페이지다.
식민지 시기의 상점가, 해방 직후의 학교, 산업화 시기의 공장,
이 모든 건물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가치관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렇지만, 개발이라는 이름 앞에서 이 건물들은 언제든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지역 사회가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는 절차는 존재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까다롭다.
또한 절차를 밟기 전에 이미 철거가 결정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여러 지역을 다니며
근현대 건축물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다.
군산의 오래된 선교사 사택, 목포의 일본식 상점가,
그리고 대구의 1930년대 양옥주택까지.
이들이 문화재로 등록되는 과정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기억과 기록, 협력과 설득,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이 글에서는 근현대 건축물을 중심으로
지역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현장의 경험과 함께 구체적으로 풀어보려 한다.
그 과정을 알게 되면, 우리는 왜 지금 기록하고 보존해야 하는지
더 명확히 깨닫게 될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1. 문화재 지정의 첫걸음 – 가치 발견

1-1. ‘이 건물이 왜 중요한가’를 찾는 순간

문화재 지정 과정은 한 건축물이 지닌 역사·문화·건축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 단계는 종종 일반 시민의 관심에서 출발한다.

2022년, 나는 전북 군산의 한 골목에서
창틀이 휘어진 목조 2층 가옥을 발견했다.
겉보기엔 허물어질 듯했지만,
건물의 주인은 “이곳은 1920년대 일본인 상인이 운영하던 잡화점이었고,
해방 후에는 우리 아버지가 인쇄소로 쓰셨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건물의 가치를 단숨에 역사 속으로 끌어올렸다.

가치 발견은 전문가보다 먼저 주민이 시작할 수 있다.

1-2. 지역 기록과 구술 자료의 중요성

발견된 건물의 가치를 입증하려면 자료 확보가 필수다.

  • 건축 연대와 설계 특징
  • 건물과 관련된 사건 또는 인물
  • 구술 기록(소유주, 주변 주민의 증언)

군산 사례에서 나는 동네 어르신 다섯 분을 만나
그 건물에서 일어난 일화를 들었다.
“그 시절, 저기서 결혼사진도 찍고, 선거본부도 꾸렸어요”라는 증언은
행정 절차에서 결정적 자료가 되었다.


2. 행정 절차의 시작 – 예비 조사와 신청

2-1. 지자체 문화재 담당 부서의 예비 조사

가치가 발견되면, 지자체의 문화재 담당 부서에 신고하거나 제안한다.
담당 부서는 다음을 진행한다:

  • 현장 방문 및 상태 점검
  • 기존 문화재 목록과의 중복 여부 확인
  • 긴급 보존 필요성 평가

목포에서는 이런 예비 조사 덕분에
철거 직전이던 일본식 목조건물이 긴급 지정되어
철거 계획이 중단된 적이 있다.

2-2. 공식 신청서와 서류 준비

신청 단계에서는

  • 건물 사진(내·외부)
  • 구조 도면(가능하면)
  • 건축 연혁 정리
  • 증언 녹취록
  • 관련 문서 사본

이 서류들이 모두 필요하다.
행정 절차상, 자료의 충실도가 높을수록 심사 통과 확률이 올라간다.
여기서 시민단체나 건축사, 역사 연구자들이 큰 역할을 한다.


3. 심의와 평가 – 전문가들의 판단대

3-1. 지역문화재위원회의 1차 심의

지정 여부는 지역문화재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위원회는 건축사, 역사학자, 문화재 보존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다.
평가 기준은 다음과 같다:

  • 희소성(비슷한 사례의 존재 여부)
  • 원형 보존 정도
  • 건축·역사·문화적 상징성
  • 활용 가능성

대구의 한 1930년대 양옥주택은
외관은 일부 변형됐지만, 내부 구조가 원형 그대로였고
지역 산업사와 연결되어 ‘희소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3-2. 주민 동의와 사회적 합의

전문가 판단만으로는 지정이 어렵다.
소유주의 동의와 주변 주민의 이해가 필요하다.
때로는 ‘개발을 통한 이익’과 ‘보존 가치’가 충돌한다.
여기서 시민단체의 중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대전에서 한 적산가옥의 보존 논의 과정에 참여했는데,
초기에는 소유주가 개발 의사가 강했다.
그러나 지역 청년들이 ‘건물 활용 플랜’을 제시하자
“그렇다면 보존을 고려해보겠다”는 태도로 바뀌었다.


4. 지정 고시와 사후 관리

4-1. 문화재 지정 고시

위원회 심의와 주민 동의가 끝나면
지자체장은 문화재 지정을 고시한다.
고시 내용에는:

  • 문화재 명칭
  • 위치
  • 지정 사유
  • 보존 범위

이 명시된다.
이 시점부터 건물은 법적 보호를 받게 된다.

4-2. 보존과 활용의 균형

문화재 지정이 끝이 아니다.

  • 유지·보수 예산 지원
  • 활용 프로그램 기획(전시, 교육, 관광)
  • 지속적 모니터링

이 세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
군산의 한 선교사 사택은 지정 후에도 방치되다가
결국 일부 훼손되었는데, 이는 사후 관리의 부재 때문이었다.


5. 현장에서 느낀 ‘성공과 실패’의 차이

5-1. 성공 사례 – 군산 선교사 사택

  • 주민·지자체·전문가 삼자 협력
  • 가치 발굴 초기부터 활용 계획 병행
  • 문화재 지정 후 즉시 개보수 착수

5-2. 실패 사례 – 철거된 대전 적산가옥

  • 발견 시점이 철거 직전
  • 자료·사진 부족
  • 소유주와 합의 실패
  • 행정 절차의 속도 한계

차이는 ‘발견과 기록의 시기’에서 갈린다.


근현대 건축물 문화재 지정 과정 요약

단계 주요 내용 핵심 주체 성공 요건
1. 가치 발견 역사·문화·건축 가치 발굴 시민·연구자 조기 발견, 주민 관심
2. 자료 수집 사진, 도면, 구술, 문서 확보 시민단체·전문가 자료의 충실성
3. 예비 조사 현장 상태 점검, 긴급성 평가 지자체 신속 대응
4. 심의 전문가 평가, 주민 동의 위원회·주민 사회적 합의
5. 지정 고시 법적 보호 시작 지자체 명확한 지정 범위
6. 사후 관리 보존·활용 병행 지자체·시민 예산·프로그램 지속
 

근현대 건축물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은
단순히 ‘행정 절차를 거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 안에는 기억을 발견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사람을 설득하고, 시간을 붙잡는 노력이 모두 담겨 있다.

내가 여러 현장을 지켜본 결과,
성공적인 문화재 지정의 가장 큰 비결은
빠른 발견과 충실한 기록, 그리고 활용 계획의 제시였다.
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 소유주와 주민, 지자체가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었다.

문화재 지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법적 보호 아래서 건물이 살아 움직이려면
지속적인 관리와 시민의 관심이 필요하다.
결국, 문화재의 진정한 가치는
‘지금’ 우리가 얼마나 관심을 두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