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건물 앞에 서면, 항상 창문부터 바라본다.
문이나 지붕이 아니라, 유난히 창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유리 뒤로 보이는 어둠, 창틀에 남은 긁힘 자국, 유리 한쪽의 미세한 금이 말하는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다.
창문은 건물의 ‘눈’이자 시대의 ‘프레임’이다.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듯, 건물도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그 시대의 공기, 사람들의 표정, 건축가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다.
근현대 시기, 한국 건축물의 창문은 단순히 빛과 바람을 통하게 하는 장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화라는 흐름 속에서 변해가는 생활 방식과 사회 제도의 표상이었고,
동시에 정치적·문화적 상징물이었다.
붉은 벽돌 건물의 아치형 창, 학교 강당의 가로로 긴 창, 병원의 하얀 철제 창틀…
그 모든 형태는 시대의 미감을 반영했으며, 때로는 권력의 의지를, 때로는 주민들의 생활 지혜를 드러냈다.
이 글에서 나는 ‘창문’이라는 작은 틀을 통해 근현대 건축물을 다시 읽어내고,
그 속에서 시대의 시선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 여정은 단순한 건축 양식 탐구가 아니라,
창문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본 건물들의 오랜 목격담을 듣는 일과도 같다.
독자는 이 글을 읽으며 창문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
다음번에 오래된 건물 앞을 지나갈 때, 나처럼 창문 속에 비친 ‘그 시절’을 찾아보게 될 것이다.
1. 창문, 건축의 눈이 되다
1-1. 빛과 환기의 통로에서 상징으로
근대 이전의 한옥 창호는 주로 종이와 나무로 구성되어 빛을 은은하게 들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서양식 건물이 들어오면서 유리창이 보급됐다.
이 변화는 단순한 재료 변화가 아니라, 생활 방식의 변화를 의미했다.
실내에서도 바깥을 선명히 볼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벽 안쪽에서 바깥세상으로 확장되었다.
내가 전주 구 시청 건물에 갔을 때,
아치형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마치 한 세기 전 서류를 쓰던 공무원의 책상 위에 그대로 멈춰 있는 듯했다.
그 빛 속에 먼지가 춤추듯 흩날렸고,
나는 잠시 그 시절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한 착각을 했다.
1-2. 건물의 성격에 따른 창문 디자인
병원, 학교, 관공서, 주택은 각기 다른 창문 형식을 택했다.
병원 창문은 위생과 채광을 위해 크고 하얗게,
학교 창문은 복도와 교실에 균등하게 빛을 나누기 위해 길게,
관공서 창문은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크기와 모양을 엄격히 대칭시켰다.
주택은 사생활 보호와 환기 사이에서 절충안을 찾았다.
2. 시대별 창문의 변천
2-1. 개항기 – 서양식 아치와 직사각
개항기 건물에서는 아치형 창문과 직사각형 창문이 공존했다.
아치형은 웅장함과 안정감을 주었고, 직사각형은 기능성과 시공의 용이성을 높였다.
군산세관 건물의 붉은 벽돌과 아치형 창문은 당시 서양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대표적 사례다.
2-2. 일제강점기 – 절제와 대칭의 미학
이 시기 건물은 일본식 목조 건축과 서양식의 절충이 두드러졌다.
창문은 대칭 배치가 일반적이었고,
목재와 유리를 결합한 미닫이식 창이 많았다.
목포의 옛 법원 건물에서는
창문 틀마다 똑같이 간격을 맞춘 정밀함이
권위와 질서를 강조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2-3. 해방 이후 – 대량생산과 표준화
1950~70년대는 경제성장과 함께 건축 자재의 표준화가 진행됐다.
알루미늄 창틀과 슬라이딩 창이 대량 보급되며
개성 있는 창 디자인이 줄었다.
서울의 옛 구로 공단 사무동 창문들은
규격화된 틀 속에서 단조롭지만 효율적인 시대상을 반영한다.
3. 창문에서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
3-1. 교실 창가의 풍경
나는 전북의 한 폐교를 방문했을 때,
창가에 놓인 오래된 나무 책상 위에
연필로 새겨진 ‘졸업 1968’이라는 글씨를 발견했다.
그 창문 너머로는 여전히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반세기 전 학생들이 같은 풍경을 바라봤을 것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울림을 주었다.
3-2. 병원 창문과 치유의 빛
군산의 옛 일본식 병원 건물은
큰 창을 통해 햇빛이 환하게 쏟아졌다.
당시 의학은 빛과 공기를 ‘치유의 필수 요소’로 여겼다.
창문은 그 철학을 구현하는 도구였다.
4. 보존과 재해석의 움직임
4-1. 원형 보존
일부 건물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창문 원형이 그대로 유지된다.
서울 정동의 구 러시아공사관 창문은
100년 넘게 당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4-2. 현대적 활용
다른 경우, 창문은 형태를 살리되 기능을 현대화한다.
전주 한옥마을의 일부 개조 카페는
옛 학교 창문틀을 재활용해 실내 인테리어로 사용한다.
과거의 시선을 현재 공간에 녹여내는 방식이다.
근현대 건축물 창문의 가치 요약
구분 | 특징 | 시대적 의미 | 사례 |
개항기 | 아치형·직사각 혼합 | 서양 문물 도입 | 군산세관 |
일제강점기 | 대칭·절제 | 권위·질서 강조 | 목포 구 법원 |
해방 이후 | 표준화·대량생산 | 효율성 중시 | 구로 공단 사무동 |
사회문화적 의미 | 빛·시선의 통로 | 생활 변화 기록 | 전북 폐교 교실 |
보존·활용 | 원형 유지·창의 재해석 | 문화자원화 | 정동 구 러시아공사관, 전주 카페 |
근현대 건축물의 창문은 단순한 건축 부속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가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
그리고 사람들의 삶의 틀을 보여주는 프레임이다.
창문이 어떻게 배치되고, 어떤 재료와 형태를 취했는지는
당대의 정치·경제·문화·기술 수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여러 도시를 걸으며,
창문을 통해 그 안의 사람과 바깥세상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폐교의 창문에서는 어린 시절의 웃음과 호기심이,
병원의 창문에서는 치유에 대한 믿음이,
관공서의 창문에서는 권위와 통제가 느껴졌다.
이제 많은 창문들이 사라지고 있다.
유리와 창틀은 쉽게 부서지고 교체되지만,
그 창문이 담았던 ‘시선’과 ‘시간’은 한 번 사라지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창문을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축 요소’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에게 시대를 해석할 새로운 프레임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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