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물

근현대 건축물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기차 여행

헤이 봄 2025. 8. 15. 03:00

나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날 때마다, 창밖의 풍경 속에서 ‘시간의 층’을 찾는다.
들판 사이로 스치는 작은 간이역, 시멘트와 벽돌이 어우러진 오래된 창고, 붉은 벽돌 담장 뒤로 보이는 낯선 건물의 지붕…
이 모든 장면은 현재의 풍경 속에 남아 있는 근현대 건축물의 흔적이다.

기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력차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철도망은 근대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개항기 이후 철도 건설과 함께 역 주변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고,
그 건물들은 단순한 구조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관공서, 은행, 우체국, 창고, 그리고 역무원 숙소까지
기차가 닿는 곳에는 언제나 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건축물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일부러 ‘빠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고속철도 대신 완행열차를 타고,
도시와 도시 사이, 역과 역 사이를 이어주는 작은 공간들을 찾아 나섰다.
이 글은 그 여정의 기록이다.
나는 기차를 타고 근현대 건축물의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한 시대의 산업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축물 속에서 발견했다.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


1. 기차와 근현대 건축의 만남

1-1. 철도 건설이 바꾼 도시 풍경

근대 철도의 등장은 한국 도시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900년대 초 경인선,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역을 중심으로 상권과 관공서가 형성됐다.
역 주변에 세워진 건물은 주로 벽돌·석재로 지어진 서양식 또는 절충식 건축이었으며,
이는 이전의 전통 건물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군산, 목포, 인천 등 항구도시의 역 주변에는
세관, 은행, 우체국이 줄지어 들어서며 ‘근대 도시의 얼굴’을 만들어갔다.

1-2. 건축 재료와 기술의 변화

기차역과 함께 세워진 근현대 건축물들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와 붉은 벽돌, 대형 유리창 등
새로운 건축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단순히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건물의 기능성과 내구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2. 노선별 건축물 답사 여정

2-1. 경부선 – 산업과 행정의 거점

서울역은 대표적인 경부선 근대 건축물이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 중앙 돔 형태가
당시 서양 건축 양식과 기술의 상징이었다.
대전역 근처에는 1930년대에 지어진 옛 대전우체국이 남아 있다.
하얀 외벽과 대칭 구조가 인상적인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공공건물의 전형을 보여준다.

2-2. 호남선 – 농업과 교역의 중심

전주역에서 기차를 내려 시내로 들어가면,
옛 전북도청 건물이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근처에는 1920년대 건립된 구 전주금융조합 건물이 남아 있는데,
기둥과 창문의 비례가 절묘해 당시 금융 건축의 품격을 느끼게 한다.

익산역 주변에는 옛 곡물 창고가 보존되어 있다.
기차 화물칸에서 직접 창고로 옮겨지는 구조 덕분에
이곳은 지역 농산물 유통의 핵심 거점이었다.

2-3. 경전선 – 항구와 철도의 연결

목포역은 종착역이자, 바다와 철도가 맞닿는 지점이었다.
목포항과 가까운 구 목포세관 건물은
붉은 벽돌과 아치형 창문이 아름답다.
역 주변의 일본식 목조 건물들은
철도 노동자와 상인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3. 기차 여행에서 만난 건물 속 사람들

3-1. 역무원 숙소의 밤

나는 장항선의 한 작은 역에서
역무원 숙소로 쓰이던 건물에 하루 묵었다.
나무 바닥은 삐걱거렸고, 창문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었지만,
그 안에는 수십 년간 이어진 밤 근무의 기록이 느껴졌다.

3-2. 은행 창구의 기억

군산의 옛 은행 건물에 들어서자,
대리석 바닥과 높은 천장이 나를 맞았다.
한쪽 구석에는 낡은 금고가 남아 있었는데,
그 앞에서 나는 기차로 현금을 실어 나르던 시대를 상상했다.


4. 보존과 활용의 현주소

4-1. 원형 보존의 성공 사례

서울역 본관은 복원과 보존 작업을 거쳐
지금은 전시와 문화행사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이 과정에서 외벽과 창문, 내부 장식이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유지됐다.

4-2. 재활용과 재해석

전주, 군산, 목포의 일부 건물들은
카페, 갤러리,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했다.
이러한 재해석은 건물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며
지역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게 한다.


기차 여행과 근현대 건축물의 가치 요약

구간 대표 건축물 특징 시대적 의미
경부선 서울역, 옛 대전우체국 벽돌+화강석, 대칭 구조 산업·행정 중심
호남선 구 전북도청, 곡물 창고 금융·유통 시설 농업·교역 중심
경전선 구 목포세관, 일본식 목조주택 아치형 창, 목조 구조 항구·철도 연결
보존 서울역 본관 원형 유지 문화유산화
활용 카페·전시장 변신 재해석·재활용 지역 문화 활성화
 

기차 여행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넘나드는 경험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근현대 건축물의 흔적을 따라가며,
철도와 함께 성장하고 쇠락한 도시들의 숨결을 느꼈다.

역 주변의 붉은 벽돌, 고풍스러운 아치, 대칭을 이룬 창문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꿈과 현실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그곳은 산업화의 열기, 전쟁의 상흔, 그리고 회복의 과정까지 담아낸 ‘건축의 기록물’이었다.

하지만 이 건물들은 지금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개발과 재건축은 필연적이지만,
그 속도에 밀려 우리는 중요한 문화적 자산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보존과 활용의 균형이 필요하다.
원형을 지키되, 현대적 기능을 부여하는 방식이
이 건물들을 미래에도 살아 있게 만들 것이다.

다음번 기차 여행에서, 나는 또 다른 건물의 창문 앞에 서서
그 건물이 바라봤을 세상을 상상해볼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시간의 유산을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